선생의 활동

당나라에서의 활동

경문왕9년(869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빈공과(유학생에만 주어지는 과거제도)에 합격하였으나 가난하여 2년동안 낙양등지를 떠 돌면서 서 류 대필로 생계를 꾸렸다.

876년에 의주 표수의 현위가 되었으나 1년만에 사직하고 종남산에 들어가서 학문을 계속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때 토벌군인 회남절도사 고변의 제도행영병마도통으로 종사관이 되어 4년간 표, 장, 서계, 격문등을 직접 지었고 특히 『토황소격문』은 명문장으로서 이름이 높다.

황소가 이 격문을 읽으면서 『다만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뿐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려고 의논 하였을 것이다』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전한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전중 시어사내공봉(공적에 대한 표창적인 성격의 벼슬)에 올랐으며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붉은 금빛으로꾸민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그린 주머니로 속에는 성명을 적은 표가 있어 궁궐을 드나들 수 있는 것)를 하사받았다.

882년 고변은 파면되었는데 귀국시까지의 3년동안 선생의 행적은 알수 없다.
따라서 선생이 당나라에서 위세를 떨쳤다는건 다소 과장된 표현인 것 같기도하다 실제로 당서 열전에도 기록이 없어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후세 사가인 이규보(고려 중기의 문신)의 선생에 대한 당에서의 활동이 극찬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귀국 활동

885년(29세, 헌강왕 11년)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에 임명되었으며,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을 지었는데 진성여왕때 건립되었다.

889년(진성여왕3년)에 재정이 궁핍하여 각 주군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져 신라는 붕괴하기 시작하였는데 진성여왕의 부정과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계의 매관매직등으로 국정의 문란함이 한계에 달하자 외직을 원하여 890년(진성여왕 4년)에 태산군 태수로 나가 백성을 다스리면서 왕명을로 낭혜화상비문을 지었다.
891년 양길과 궁예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고 892년에는 견훤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태산군을 거쳐 천령군 태수(선생의 나이 35~36세경)로 있었으나 그 년대를 정확히 알수가 없다.
893년 부성군(충남 서산) 태수로 재임중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에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 도적이 들끓어 가지 못하였다.

894년 2월(진성여왕 8년) 선생은 시국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시무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고 왕이 가납하였으며 그 공으로 6두품이 오를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아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시무10여조의 내용은 전해오지 않고 있으며 시책 또한 신라말기의 극도로 부패한 집권체제에 의하여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다.
896년(혹은 898년)에 2년전에 창건한 가야산 해인사로 입산하였다.

선생이 당나라, 신라 모두 벼슬을 하였으나 난세인지라 선생의 이상적인 정치를 할 수가 없어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유람하였는데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등이었다.

만년에는 가족을 데리고 형이 승려로 있었던 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는데 선생의 나이 42세였다.
904년(효공왕8년)에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을 지었고 908년에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었으며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020년(고려 현종11년)에 왕이 신라말기에 선생이 은연중 고려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수 없다라면서 교시를 내려 내사령에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1023년(현종 14년) 5월에 문창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선시대에 들어 정읍 태인의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영평의 고운영당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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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최종수정일
2023.11.21 10: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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