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면 게시물 검색 제목 내용 검색 총 3 건의 글이 있습니다. (1/1 페이지) 개암선생의 갓과 문집 [남계서원 창건시 시련 받던 이야기] 조선시대에 지식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향리에 서원이 산재해 있었다. 서원은 학문을 연마하는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원이 많은 곳으로는 서울에서 봤을 때 좌측에 안동이 있었고 우측에 함양이 있었다. 좌안동 우함양이라 부른 것은 안동과 함양이 학문을 숭상하여 가장 인재가 많았고 예의바른 고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왜 함양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서원이 많이 세워졌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서 였다. 서원이란 조선시대 인재 배출의 본산이었으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오늘날의 대학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서원이 주세붕이 창건한 죽계서원(소수서원. 백운동서원)을 처음 세운 이래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것이 함양의 남계서원이다. 그 밖에 ... 이진사와 구진정 [아홉명의 아들이 모두 진사시에 합격] 지금으로부터 120여년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수동중학교 터전에는 조그마한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의 이름이 구진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었는데 그렇게 불리게 된 내력이 있었다. 조선 중기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란 서울 본토박이인 한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진사라고 불렀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그는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세상이 너무나 어지럽고 사색당파의 싸움이 말할 수 없이 치열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때였다. 즉 사상의 계보, 학파의 계보, 그리고 지연으로 인한 파벌, 혈연으로 인한 파벌 등의 난맥상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가운데의 권력투쟁이 말할 수 없이 치열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벼슬도 아니하고 파벌에 가담... 칼바위가 있는 효리 [천석꾼이 30호나 되는 살기 좋은 마을] 수동면 소재지에서 약 4킬로미터 안의쪽으로 올라가면 도로 우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있는데 그 중심지는 효리라고 한다. 우명리라는 마을 이름 그대로 이 마을은 소가 운다고 해서 옛날에는 '소울이' 마을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하고 있다. 마을 뒤쪽에 위치한 해발 308미터밖에 안되는 나즈막한 승안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우명천이 이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남강지류로 흘러내리고 있다. 우명리는 고색 찬연한 기와집들이 즐비하여 옛날부터 내력있는 마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풍수지리학상으로 보면 마을이 소의 형상을 닮았고 더구나 소가 편안하게 누워서 반추하고 있는 모습의 지세이다. 옛날 사람들은 말하기를 남대문 바깥에서는 제일 살기 좋은 마을 이라고 일컬었는데 그 말은 지방에서는 살기가 으뜸인 동네라는 뜻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 « ‹ 1 › » 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5:49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매우 만족함(5점) 만족(4점) 보통(3점) 불만족(2점) 매우 불만족(1점) 의견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