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 게시물 검색 제목 내용 검색 총 64 건의 글이 있습니다. (1/7 페이지) 박문수와 과부 며느리 [뜬 소문을 바로잡은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어사가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으로 암행의 길을 떠나는 전날 밤에 그를 전송하려고 온 친척되는 사람이 “경상도 함양땅에 가면 과부된 며느리를 데리고 사는 이진사라는 자가 있는데...” 하는 말을 무심코 했다. '며느리를 데리고 산다?' 박문수는 이 말이 며느리를 보통으로 데리고 산다는 뜻이 아님을 짐작하고 기억해 두었다. 며칠 후 박문수는 함양땅에 들어섰다. 며느리를 데리고 산다는 이진사의 마을을 찾아서 폐의파립(弊衣破笠)의 과객 모양을 하고 들어갔다. 동구 밖에서 “이 마을에 이진사댁이 어디오?” 하고 물으니 어떤 사람이 괴이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며 “이진사댁이란 무엇 말라빠진거요? 이가의 집은 저 외딴 대나무 숲속이오.” 하는 것이었다. “왜 이진사라 하면 못씁니까?” “제 며느리를 데리고 사는 놈이 무... 고동바위 [한 장애자 부부의 숭고한 애정] 여기에 애처로운 사랑 얘기가 있다. 가난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의지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부부사이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슬픈 이야기가 많이 있다. 가난하면서도 사랑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뜨거운 사랑,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 그러한 사랑을 주고 받는 가운데서 행복은 싹트는 것이다. 함양읍에서 서쪽으로 십리길을 소백산맥 중턱으로 올라가면 아늑한 분지로 된 고원지대가 나온다. 이곳에 있는 마을이 웅곡마을이다. 웅곡리 한들재의 왼편 산 기슭에는 고동처럼 생긴 시커먼 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고동(다슬기)같이 생겼다고 해서 고동바위라고 부른다. 이 고동바위는 날씨가 궂고 비가 올 때가 되면 처량한 소리로 울어대곤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해 주고 있다. 옛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 원님과 호차(虎茶) [지리산에 차나무를 기르게한 김종직] 초엽 따서 상감님께 바치고 중엽 따서 부모님께 드리고 말엽 따서 남편에게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지어 봉지 봉지 담아 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무럭 무럭 자라나서 경상 감사 되어 주소. 어느 때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우리 함양 지방에서 불려졌던 차노래다. 우리 지방은 영산 지리산을 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유한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호차라는 차가 있어 우리 지방의 자랑거리로 되어 있었다. 1471년 점필재 김종직(1431~1492)선생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온 후부터 발견된 이 호차는 그 내력을 볼 때 약 5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점필재가 함양으로 올 당시 조정에서는 임금께 진상할 차를 바차게 하였던 것이다. 이곳 함양에도 예외가 아니여서 차의 양이 배정되어 백성들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 곰실 마을의 당산제 [우환이 계속되는 마을의 미신] 옛날에는 병이 들어도 병명을 알 길이 없어 무슨 병인지 잘 몰랐다. 특히 돌림병이 마을에 유행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기에 마을에 돌림병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전멸하다시피 많은 사람의 생명을 잃곤 하였다. 특히 마을사람들은 공동우물을 사용했고 위생관념이 희박하여 피해가 더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미신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다. 옛날 함양읍 곰실(웅곡)마을에는 원인도 모르는 병이 자주 돌아다니고 우환이 많이 찾아들어 마을 사람들은 유명한 무당을 불러 마을이 평안하게 해달라고 굿도 해보고 서낭당에 가서 빌어보기도 하였다. 무당이라고 해서 그것을 알까마는 굿을 마치고나서 마을 사람들은 무당에게 “앞으로는 우리 마을이 예전처럼 태평무사한 마을이 될 수 있을 런지요?” 하고 물었다. 이에 무당은 자기의 힘으로는 ... 나무에 걸어놓은 갓 [갓걸이 마을의 유래] 고을마다 고사에 얽힌 이야기나 지명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있다. 또 고사에 근거해서 정해진 지명이나 사건도 많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역사의 변두리에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나게 되고 또 그러한 이야기들이 전설로 전해지게 된다. 함양지방은 삼국시대의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요, 소백산맥을 넘는 관문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더욱 많다고 하겠다. 여기에 소개하는(갓걸이)라는 지명은 함양읍 소재지에서 약 3km 떨어진 천령봉 아래, 남원으로 넘어가는 국도변에 위치한 난평리 관동마을의 속칭이다. 그러니까 관동마을이 생기기전의 일이었다. 이 마을의 동남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한 새터마을 뒤에는 선붓재라는 재가 있다. 어느 날 이 재를 넘어가는 유명한 도인이 있었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도인이었는데 땀을 뻘뻘 흘리... 몸이 두동강난 호랑이 [동자를 잡아먹은 호랑이] 함양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소백산 줄기의 팔령치 남쪽으로 솟아있는 산을 삼봉산이라 한다. 이 삼봉산 골짜기에 가면 그 흔적은 없지만 골짜기 이름이 절터골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옛날에 이 곳에는 조그마한 사찰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 많은 노스님이 동자승을 하나 데리고 살고 있었다. 동자는 늙은 스님을 도와서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숲속에서 땔나무를 해 오기도 하고 밥을 짓기도 하며 때를 맞추어 종을 치기도 하면서 노승을 도왔다. 그런데 노스님은 가끔 시주를 걷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돌아오곤 하였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스님이 마을로 내려갔다가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녀서 어둠이 깔릴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였다. 어린 동자승은 날이 점점 저물어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너무 늦게까지 스님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고 이심전심으로 사찰로... 시비정거리 [문제 해결을 위한 조상들의 지혜]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의 여론은 무시할 수 없다. 독불장군이 없다는 말도 제 혼자 아무리 똑똑한 체 해도 일반 대중이 호응해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중들의 여론으로 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간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이야기가 있다. 시비정거리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함양읍 운림리에 위치한 시비정거리는 지금은 경남맨션 뒤 사거리가 있는곳에서 위천수 제방뚝 쪽으로의 거리를 말하며 '구장터'라고 불리어진다. 근세 이후로 마을주민들 간에 문제가 생기고 시비가 붙으면 여론에 따라 시비를 가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거리였다고 하여 시비정거리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모여 휴식이나 대화를 나누던 곳이였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그러한 문제들이 대중의 입에 ... 월명총 이야기 [행상과 역녀의 사랑] 함양의 관문인 수동 삼거리에서 함양읍으로 들어오는 다리를 건너면 왼편 산밑에 몇 채의 가옥들이 붙어 있는 마을이 보인다. 이곳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함양읍 백천리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이 월명 부락으로서 그 이름이 월명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월명총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의 이곳은 사근(水東)은 역마가 있었던 역촌으로서 지금의 화산리에 사근역이라는 역이 있었다. 이 역은 진주, 마산 등 남부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말을 바꿔타고 가는 곳이었다. 이곳 사근역에 월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역녀가 있었다. '역녀'란 옛날 역에 소속되어 역일을 돕는 여자로 신분이 낮은 여자였다. 그런데 이곳 역촌에 경주 사람이라는 총각이 있었는데 행상을 하면서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얼굴도 잘 생겼으며 마음씨가 아름답고 성격이 부드러워서 ... 이은대(吏隱臺) [김종직이 유자광을 피해온 곳] 이은대는 함양읍을 흐르고 있는 뇌계(위천수)의 남쪽, 지금의 함양제일교와 제이교의 중간쯤 되는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방송국 앞에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함양의 시가지를 바라보며 솟아있는 곳이 이은대요, 그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이은리라고 한다. 이은대란 글자 그대로 관리가 숨어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조선조 성리학의 대가이며 영남학파의 종조였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곳 이은대에 얽힌 전설이 있다. 지금부터 500여년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와 있을 당시 유자광과의 사이에 생긴 이야기다. 유자광이 종의 몸에서 천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세조에게 특채되어 당시의 훈구파에 정치적 뿌리를 박고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왕이 바뀔때마다 줄타기를 잘 해서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유자광이 경상... 최치원의 치적과 효성 [상림 숲에 뱀, 개구리, 개미를 몰아 냄] 최치원은 신라 헌강왕 원년(857년)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설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문창이라는 곳의 수령으로 있을 때 선생의 모친이 최치원을 잉태한 지 넉달만에 금돼지로부터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육개월만에 치원을 낳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차마 이 아기를 기를 수가 없어서 치원을 내다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무인도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데 밤만 되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젖을 먹여 키웠고 낮이 되면 오색 무지개가 찬연한 하늘에서 큰 학 한 마리가 날아와서 치원을 품고 있었으므로 짐승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있어 아무 탈이 없게 되자 이상히 여겨 집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와서 키웠다고 한다 선생이 무인도에서 책을 읽을 때 소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중국의 황제 귀에까지 들려서 황제는 신라국에 학사를 보내어 ... « ‹ 1 2 3 4 5 6 7 › » 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7 13:10:56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매우 만족함(5점) 만족(4점) 보통(3점) 불만족(2점) 매우 불만족(1점) 의견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