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면 게시물 검색 제목 내용 검색 총 11 건의 글이 있습니다. (1/2 페이지) 강대무덤 [능욕을 당한 한 여인의 복수] 옛날에는 가난한 생활과 양반들에게 학대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견디다 못해 산으로 도망을 가 산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흉년이 들거나 민심이 흉흉해지면 도둑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설치게 된다. 여기에도 그 도둑들로 말미암아 생긴 이야기가 있다. 안의면 귀곡마을에서 초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는 옛날에 산도둑이 심해서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만 넘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초동마을에서 귀곡마을로 시집을 간 여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초동마을의 친정댁으로부터 어머니께서 병환이 나셔서 무척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그녀는 어머님의 위독한 병환만 생각하며 산도둑이 많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고 초동마을을 향해 잽싸게 걸어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고정부락의 구두쇠 [인색한 부자의 최후] 안의면 월림리 고정마을과 국도 사이의 논들을 보면 옛날에 물이 흘러간 하천이었음을 누구든지 금방 알 수 있는 곳이다. 농월정 앞을 구비쳐 흐르는 맑은 물결이 옛날에는 이곳으로 춤을 추며 흘러갔다고 하며 그 당시에는 하천 정비나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아 큰 비만 오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수해로 인해 들이 하천으로 변하고 물길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곤 하였다. 그리고 가물면 물이 없어 농사도 짓기 어려웠다. 이곳 고정마을도 옛날에는 지금 흐르고 있는 냇물바닥은 논과 밭들이고 그 사이에 욕심많고 인색한 부자가 하나 살고 있었다. 고래등같은 큰 기와집을 짓고 떵떵 울리며 살았다고 한다. 어찌나 구두쇠이고 인색한지 자린고비나 놀부 이상으로 남을 동정할 줄 모르고 집안 식구들의 먹는 것조차 벌벌 떠는 욕심장이라고 하였다. 주인뿐 아니라 모든 식구들이 그 ... 노부부와 버선골밭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화림동 계곡과 더불어 함양에서고 아름답기로 이름난 심진동 계곡(용추계곡)을 들어가노라면 도중에 매표소와 주차장이 있는데 거기서 계곡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도로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절경을 바라보며 명상하듯 조용히 서있는 심원정이라는 정자 하나를 볼 수 있다. 계곡과 숲,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 정자 주변의 경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절경 중에 하나가 심원정이다. 이곳 심원정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 안의면 하원리 내동마을이라고 하는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변에 '정태일의 처 안동권씨'라고 새겨져 있는 열녀비가 서있다. 이 비석은 늙은 부부의 애틋한 사랑의 슬픈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가슴이 메마르고 심장이 식어가는 요즈음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의 불길을 되찾게 해 줄 수 있는 사랑 얘기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옛날 심원정의 맞... 백정이 된 효자 [어머니 눈을 뜨게 한 효자의 정성] 안의면 교북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이 산재해 있는 고장으로 후암, 관북, 교동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후암은 속칭 ‘맥부리’라 하여 옛날에 후암사라는 절이 있어서 그렇게 불리워지고 있다고 하며 관북은 ‘역말’이라 하여 옛날에 역참이 있던 것이라 하고 또한 안의 현청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불리워졌다고 한다. 교동은 향교가 있는 마을로서 세 마을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동에서 100m 정도 올라가면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위에 비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조씨라는 성만 전하는 사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효자비이다. 천민이라고 해서 이름을 쓰지 않고 비석을 세워 준 것만으로도 후대해 준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주민들로부터 백정비라고 불리우는 이 비석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마을에 앞을 보지 못... 상사바위 [동자승을 짝사랑한 여인의 비운]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이차돈의 순교로 말미암아 폭발적인 모습으로 번져나갔다. 불교가 한창 포교되던 신라 중기 사찰이 건립되고 암자들이 번창하던 때의 일이다. 함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난 안의면 심진동 계곡을 올라가면 장수사가 있고 장수사를 중심으로하여 용추암, 은신암 등 많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용추폭포 절벽 위에 용추사라는 절이 있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절이 아니라 암자였었다. 이 용추암의 동쪽으로 약 1km쯤 되는 곳에 절벽을 이루고 있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아래에는 조그만한 암자가 하나 있었고 한창 나이의 젊은 중들이 정열을 쏟아 불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암자에 꽃다운 나이의 어여쁜 처녀가 불공을 드리러 왔었다. 암자에 여자가 오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도를 닦는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요괴와 같기 때문... 옹기장수 정씨 할아버지 [근면성실한 정씨의 아름다운 마음] 어디에서 어떻게 굴러왔는지는 모르지만 옛날에 한 옹기장수가 안의에 와서 자리를 잡아 살고 있었다.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 그의 조상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장날을 찾아 이 장 저 장을 돌아다니며 옹기장사를 하여 돈을 모으고 알뜰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장사를 하여 논마지기를 사 모을 만큼 제법 돈을 벌어 모았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늘 근심에 쌓여 있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을 둘 수 있는 고향이 있어야 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보금자리를 삼을 수 있는 가정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옹기장수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장돌뱅이라는 것과 장가를 들지 못하여 아내와 자식이 없고 단란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늘 그를 서글프게 하였다. 그... 우씨 가문의 효자 [호랑이까지 도와준 효자] 안의면 월림리에는 옛날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우씨 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에 효자가 있었다. 그 가문에 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효자 우씨는 오랜 지병으로 고통을 겪으며 사경을 헤매는 부모님을 모시고 안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황석산 산신령에게 부모님의 병을 고쳐 달라고 빌었고 사방을 수소문하여 좋다는 약을 다 구하여 정성스럽게 다려 드리기도 하였다. 새벽녘에는 부모님의 배설물을 혀로 맛보고 병환의 차도를 짐작하고 하였다고 한다. 농촌인지라 낮에는 농사일에 바쁜 몸이지만 부모님의 간병에는 항상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진맥을 하고 약을 짓기 위해 방문한 의원으로부터 부모임의 병화에는 호랑이 고기가 영약이라는 말을 들었다. 호랑이 고기를 구하기 위해 지리산, 덕유산 등 산골짜기의 포수들에게... 은신암과 무학대사 [무학대사가 숨어 살던 곳] 안의면 상원리에는 은신암(隱身庵)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1950년 6.25의 전화로 애석하게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암자는 조선 태조시대 갑술년(1394년)에 당시 이태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학대사가 서울 도성의 터를 잡은 후 이곳으로 내려와 창건한 것인데 여기에 얽혀 전해오는 이야기를 남기고자 소개하려 한다. 무학대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조 초기까지의 사람이며 이성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이성계가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를 치고 정권을 탈취하여 조선을 세우고 난 후의 일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 당시의 서울을 개경에서 다른 곳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궁궐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대궐을 건설할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새로운 서울이 될만한 곳을 찾으라는 명령을 무학대사에게 내렸던 것이다. 무학대사는 왕의 중차대한 ... 의병장의 갑옷 [왜적에 대한 분노]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왜구들의 침입에 의해 남부 해안지방은 항상 수난을 당해 왔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은 서울이 함락되고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왜적들의 침략행위였다. 여기 그 침략자들을 무찌르기 위해 일어선 의병장의 이야기가 있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이끌고 왜적들과 싸우던 장수가 하나 있었다. 그는 책을 읽던 나약한 선비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모형제가 왜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슬픔을 겪게 되자 조국과 혈육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들을 모아 왜적을 찾아다니며 무찌르게 되었다. 그는 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요새가 될만한 산속에 숨어 있다가 적의 부대가 나타나면 동정을 살펴 방심하는 기회를 포착하고 신출귀물 적을 살육하고 사라지곤 하였다. 그가 이끌던 의병들은 수가 비록 적지만 그들보다 많은 왜적들과 싸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맞부딪... 정여창선생과 아리랑고개 [소의 목을 잘라 길을 낸 선생] 안의면 당본리 죽당마을과 월림리 사이에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안의면 소재지에서 약 1 km 지점에 위치한 이 아리랑고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성종3년,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난 정일두(정여창)선생은 영리하고 지혜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담이 크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난 분이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하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열심히 학문을 닦아서 청운의 큰 뜻을 품고 과거를 보려고 한양을 향해 집을 떠나게 되었다. 평소에 효성스럽고 남달리 조상을 섬기는 선생은 한양으로 떠나는 전날 선현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조상님들에게 온 정성을 기울여 합격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머나먼 여행길을 떠나는 날 정여창 선생은 종자 한명만을 데리고 괴나리 봇짐을 꾸려 집을 떠... « ‹ 1 2 › » 담당 문화체육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6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6:09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매우 만족함(5점) 만족(4점) 보통(3점) 불만족(2점) 매우 불만족(1점) 의견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