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면

함양의 전설

은신암과 무학대사 [무학대사가 숨어 살던 곳]

안의면 상원리에는 은신암(隱身庵)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1950년 6.25의 전화로 애석하게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암자는 조선 태조시대 갑술년(1394년)에 당시 이태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학대사가 서울 도성의 터를 잡은 후 이곳으로 내려와 창건한 것인데 여기에 얽혀 전해오는 이야기를 남기고자 소개하려 한다.


무학대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조 초기까지의 사람이며 이성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이성계가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를 치고 정권을 탈취하여 조선을 세우고 난 후의 일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 당시의 서울을 개경에서 다른 곳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궁궐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대궐을 건설할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새로운 서울이 될만한 곳을 찾으라는 명령을 무학대사에게 내렸던 것이다.

무학대사는 왕의 중차대한 명령을 받고 여러 곳을 물색하며 돌아다니다가 한양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과연 명산으로 둘러싸여 있는지라 이곳이 도읍을 할만한 곳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학대사도 야심이 있고 욕심이 있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워서 불교를 재건하여 널리 포교할 것을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런 뜻은 속으로 감추고 한양을 뒤로하여 이곳을 지나서 충청도 계룡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계룡산에다 터를 잡고 부지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때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계룡산으로 내려가 살펴보고서는 무학대사가 품고 있는 야심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 낼 수 없고 조용히 해결하고자 지혜를 짜내었다.

그래서 부지공사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돌에다가 '妖僧無學誤入鄭氏之地'라는 글을 새겨서 부지공사를 하는 땅속에 무학대사가 모르게 묻어두었다.

즉 그 내용인즉 '요망스러운 중인 무학이 정씨가 도읍할 땅에 와서 덤빈다'는 뜻인데 정감록 비결에 보면 '계룡산은 정씨의 도읍지이지 이씨의 도읍지는 아니다'라고 무학을 깨우치기 위해서였고 무학이 품고 있던 욕심을 깨우치기 위해서다.
이것은 무학이 품고 있던 욕심을 버리게 하려는 정도전의 계책이었다.

부지공사를 하다가 땅속에서 인부가 파낸 돌비석을 보고 무학대사는 아연실색하였다.
내 생각이 탄로났구나! 할 수 없이 무학대사는 하던 공사를 중지하고 한양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야심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왕십리에 궁궐터를 정하고 부지공사를 착수하였다.
정도전이 무학의 술책을 알고 또 돌판에 「往十里」 즉 십리를 더 가서 공사를 하라는 뜻으로 돌에 새겨서 땅속에 묻었다.

공사하는 인부가 이 돌을 주워 무학에게 보이니 무학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야심을 버리고 지금의 궁궐터에 공사를 착수했다고 한다.
서울의 왕십리란 지명이 이러한 고사로 연유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궁궐을 짓게 되었지만 다 지어가면 궁궐이 무너지고 또 지으면 넘어지고 하니 무학도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몸을 피할 목적으로 정처없이 길을 떠나서 어느 산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산비탈에서 소를 몰고 밭을 가는 노인이

“이랴 이 놈의 소야, 무학보다 못한 놈.”

이라고 소를 꾸짖으며 소를 고삐로 때리는 노인을 보았다.
무학대사는 그 노인에게

“여보시오 노인장, 어찌하여 무학이를 소에다 비교하오?”

하고 물었다. 그 노인은 대답하기를

“서울 궁궐터가 학의 설이라 학을 날지 못하게 네 곳을 눌러놓고 궁궐을 지어야 할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집을 지으니 학이 날개를 치면 지어놓은 궁궐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오. 이런 이치를 모르니 무학이가 소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오.”

하고 말을 마치고는 간 곳이 없어졌다.

이 말을 들은 무학은 너무나 기뻐서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왔다.
노인의 말대로 네 곳에 사대문을 먼저 세워놓고 궁궐을 지었더니 과연 노인의 말대로 훌륭한 궁궐이 지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정도전도 야심이 있는 사람이다. 언제 무학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학이가 품었던 욕심을 떠벌릴지 모른다.

즉 지금의 궁궐터에 큰 절을 지으려고 도읍터를 충청도 계룡산에다 잡았다가 정도전에게 발각되어 중지하고 왕십리에서 하다가 다시 발각되어 중지한 일들을 언제 폭로할지 모른다.

이러한 사실을 왕에게 아뢰는 날이면 무학의 목이 열개라도 다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심하고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

무학대사는 그 길로 몸을 피하기 위하여 각처를 헤매다가 이 곳 안의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학은 경치가 아름다운 심진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편에 매바위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매바위는 산 중턱에 튀어나온 자연석의 큰 바위 형상이 날개를 오므리고 부리를 아래로 하고 쉬고 있는 매의 형상 그대로다.
누구의 설명도 필요 없이 아무라도 이 길을 올라가면 이 바위가 눈에 뜨이고 보면 금방 매바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있다.

무학은 매바위가 있으니 틀림없이 꿩설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주변의 지형을 찾아다니다가 보니 과연 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의 지형이 있어 그 지형을 찾아서 거기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숨어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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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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