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면

함양의 전설

칼바위가 있는 효리 [천석꾼이 30호나 되는 살기 좋은 마을]

수동면 소재지에서 약 4킬로미터 안의쪽으로 올라가면 도로 우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있는데 그 중심지는 효리라고 한다.

우명리라는 마을 이름 그대로 이 마을은 소가 운다고 해서 옛날에는 '소울이' 마을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하고 있다.

마을 뒤쪽에 위치한 해발 308미터밖에 안되는 나즈막한 승안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우명천이 이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남강지류로 흘러내리고 있다.

우명리는 고색 찬연한 기와집들이 즐비하여 옛날부터 내력있는 마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풍수지리학상으로 보면 마을이 소의 형상을 닮았고 더구나 소가 편안하게 누워서 반추하고 있는 모습의 지세이다.

옛날 사람들은 말하기를 남대문 바깥에서는 제일 살기 좋은 마을 이라고 일컬었는데 그 말은 지방에서는 살기가 으뜸인 동네라는 뜻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로 들에는 돌 하나 없이 땅이 비옥하고 물이 깨끗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한 마을이다.


조선 초기에 이 마을에는 부자들이 많아 천석꾼이 30가구나 살았다고 전한다. 이들의 농토는 김해평야와 호남지방의 넓은 평야지대에 흩어져 있었다.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 그렇듯 많은 재산으로 넉넉한 살림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마을 전체가 소와 연관을 갖고 있는 지형 때문이라 하였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였고 소는 풍만과 평화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옛날에 이 마을에는 세 곳의 우물이 있었다.
그 세 개의 우물터는 소의 여물통과 젖이 나오는 곳, 오줌이 나오는 곳을 상징하였고 쇠뿔처럼 생긴 바위가 두개 있었다 한다.

아무튼 어려움 없이 넉넉한 살림을 꾸려나가던 이 마을의 세력이 차차 약화된 것은 승려를 구박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초기의 사상적 배경을 보면 유교가 줄기차게 뻗어나가고 불교가 쇠퇴하여 위축되어 갈 때였다.
그러한 시대에 승려가 푸대접을 받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마을에도 탁발승이 방문했다가 번번히 푸대접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 수도승이 찾아와 어느 부자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는 지형을 살펴보니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마을임을 알았다.

그 수도승은 집주인에게

“이 마을은 잘 사는 마을이지만 잘만하면 이보다 더 잘 살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집주인은 도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을 앞에 서 있는 칼바위를 없애고 그 부근의 큰 바위 두개중 하나를 뽑아내서 마을 앞의 연못에 메우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떠나버렸다.

그 말을 듣고 난 주인은 호기심이 점점 강해지고 욕망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더 잘 살고 싶어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하루 아침에 시키는 대로 바위를 뽑고 못을 메웠다.
칼바위를 잘라낼 때 학 세 마리가 나와서 동서남 세 방향으로 날아가 버리고 그 바위에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는데 그래서 지금도 그 바위는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의 집들은 마루밑에서 불길이 솟아올라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김해 평야와 호남지방에 흩어져 있던 곡식 창고도 일시에 불이나 망해버리고 말았다 한다.

그것은 지맥을 완전히 끊어버린 결과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의 머리앞에 있는 칼바위는 소가 그것을 볼 때마다 용을 써서 기를 살리는 역할을 하였다.
큰 바위 두개는 소의 뿔인데 하나를 잘랐으니 소의 기력이 다하게 된 것이다.
또 연못은 소의 여물통이니 소의 명이 다하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은 이러한 전설만 유명한 것이 아니다.
효리 마을은 효자가 많이 나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옛날부터 경상도의 좌안동 우함양(左安東 右咸陽)이라는 말을 두고 우함양이 바로 이 이 효리 마을의 인물들 때문이라는게 이 마을 사람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이 마을에 있는 구천서원에 제향되어 있는 여섯분의 어른이 모두 효리마을 출신이다.
박맹지(朴孟智)는 성종때의 학자였고 남계 표연말(表沿沫)은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대학자였다.
성종 때의 명필가였던 금제 강한(강한), 명종실록을 편찬한 양희(양희)선생, 상제초례(상제초례)를 쓴 하맹보(하맹보), 청백리로 이름을 날린 일로당 양관(양관)등 쟁쟁하다.

이러한 학자들이 모두 효리 마을에서 태어났음은 우함양의 본거지 라는 주장이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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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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