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면

함양의 전설

이진사와 구진정 [아홉명의 아들이 모두 진사시에 합격]

지금으로부터 120여년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수동중학교 터전에는 조그마한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의 이름이 구진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었는데 그렇게 불리게 된 내력이 있었다.


조선 중기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란 서울 본토박이인 한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진사라고 불렀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그는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세상이 너무나 어지럽고 사색당파의 싸움이 말할 수 없이 치열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때였다.

즉 사상의 계보, 학파의 계보, 그리고 지연으로 인한 파벌, 혈연으로 인한 파벌 등의 난맥상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가운데의 권력투쟁이 말할 수 없이 치열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벼슬도 아니하고 파벌에 가담하지도 않은 이진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적으로 몰려 함양의 수동으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다.
귀양처는 지금의 수동면 본통에 있는 까막섬이라는 곳이었다.

이진사의 성품은 활발하고 호방하여 이웃들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술을 마시며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심을 잃지 않아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귀양지를 이탈하여 어느정도의 자유를 누려도 눈을 감아주고 밀고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자유한 죄인의 몸이지만 너무나 답답하여 귀양처에만 주저앉아 생활하기가 무척 힘들었고 한편으로는 술 생각이 간절하여 은밀히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사근의 막걸리 맛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진사는 천리 길 낯선곳에서의 귀양살이의 외로운 심경을 달래며 술을 마시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거처를 뛰쳐나와 사근으로 달려갔다.
까막섬에서 사근까지의 거리는 오리쯤 되는 길이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단숨에 달려가서 사근에 이르렀다.
오래간만에 막걸리를 맛보게 되니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회포를 억제할 길이 없었다. 지나간 일들과 선비들의 당파싸움으로 인해 억울하게도 엉뚱한 불똥이 튀어 천리길 머나먼 타향으로 귀양을 오게된 일들, 그리고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더욱 외로움이 가중되었다.

그는 은밀한 가운데 자주 사근의 술집으로 찾아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던 중 이 고장의 여러 선비들과 만나고 사귀게 되었다.
그 선비들과 스스럼 없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어 시부를 읊기도 하고 문장을 쓰기도 하며 자기가 아는 대로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지식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인간미가 넘치고 소탈한 선비, 호방한 그의 성품 때문에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고 그를 이해하며 은신할 수 있도록 생활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진사에게는 술을 마시고 벗들과 시부를 읊고 사귄다고 해서 마냥 즐겁고 낙천적인 생활이었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밤새 소리나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쓸쓸해지고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시름에 밤잠을 설치고 눈물로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렇게 술집을 드나들며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그는 그 주변의 다른 주막집으로 옮겨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주막은 미색을 갖춘 젊은 과부가 꾸려가는 술집이었다.
그녀의 근본은 어딘가 모르게 보통 주막집의 주모와는 달랐는데 뼈대가 있는 집안에서 자란 여인이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 주모는 나긋나긋할 뿐만 아니라 아녀자답지 않은 기풍이 넘치고 행동거지가 단정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흐트러지지 않은 행동과 다정다감한 말씨로 그녀는 이진사를 볼 때마다 남들과는 다른 태도로 보는 것 같았다.
이진사는 이곳으로 술집을 옮겨 자주 드나들며 술을 마시게 되었다.

이렇게 드나들다 보니 서로 가까워지고 정이 들게되어 서로의 마음이 합쳐지게 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불꽃이 튀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잠시만 보지 않아도 마음이 설레이고 사랑의 열병으로 뼛속까지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정이 깊어만 갔다.

결국 그 주모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뜨거운 사랑을 속삭이게 되어 그 결과 자식까지 얻게 되었다.
그들은 사랑에 빠져 어느결에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자식을 네명이나 얻게 되었다.

귀양살이를 하는 영어의 몸이 어떻게 가정을 가질 수가 있으며 자식을 두게 되겠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겠지만 그는 인심을 잃지 않고 벗들을 많이 사귀어 그들이 감싸주고 또 재치있는 그의 행동으로 서울에서 확인 내려오면 즉시 귀양처로 돌아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문제를 피하곤 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는 사면이 되고 귀양지에서 풀려나 푸른 하늘 아래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귀양살이를 오기 전에 벌써 고향인 서울에서 결혼한 아내에게서 5형제의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귀양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미 아내는 죽고 5형제의 자식들만 남아 있었다.

그는 이 자식들을 데리고 이곳 수동으로 이사를 하여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소실에게서 낳은 4형제의 아들과 합쳐 모두 9형제의 아들이 되었다.
자식복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양육하였다.

그는 본부인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곳 귀양지에서 만난 소실을 정실로 들어앉히고 계속 주막을 경영하면서 막걸리를 빚어 팔아 자식들 교육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9형제가 열심히 공부하여 진사 시험을 차례로 치르고 9명 모두가 진사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칭송이 자자했고 가정은 화기가 넘쳤다.
9명의 자녀들은 모두가 우애를 돈독히 하면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서울대로의 물질 문명이나 문화 생활을 접하고 생활의 편리한 점이 있지만 시골은 시골대로의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당파싸움이나 생존에 대한 염려나 위협을 받지 않고 한가로운 삶을 살수 있어 좋았다.

오랫동안의 귀양 생활로 이제는 시골생활에도 익숙해져 있어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조용히 자식들 교육에 재미를 붙이고 복된 삶이라 생각하고 만족하게 살았다.

이런 연유로 해서 사근에 있는 이곳 우물물로 막걸리를 만들어 팔아 자녀들 공부를 시키고 9형제가 모두 진사가 되었다하여 이 우물을 구진정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내려온다.

이진사에게서 우리는 사람이 대인 관계가 원만하면 누구에게나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모나게 사는 것보다 스스럼 없이 원만한 삶을 사는 것이 사회에도 유익하고 자신에게도 복된 삶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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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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