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면

함양의 전설

개암선생의 갓과 문집 [남계서원 창건시 시련 받던 이야기]

조선시대에 지식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향리에 서원이 산재해 있었다.
서원은 학문을 연마하는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원이 많은 곳으로는 서울에서 봤을 때 좌측에 안동이 있었고 우측에 함양이 있었다.
좌안동 우함양이라 부른 것은 안동과 함양이 학문을 숭상하여 가장 인재가 많았고 예의바른 고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왜 함양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서원이 많이 세워졌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서 였다.
서원이란 조선시대 인재 배출의 본산이었으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오늘날의 대학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서원이 주세붕이 창건한 죽계서원(소수서원. 백운동서원)을 처음 세운 이래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것이 함양의 남계서원이다.
그 밖에 함양에는 당주서원, 백연서원, 도곡서원, 구천서원, 송호서원, 정산서원, 청계서원, 용문서원, 화산서원 등이 있었다.

남계서원(지방문화재 91호)을 세운 이는 개암 강익 선생이다.
선생은 동국 18현이면 조선조 5현의 한분이신 문헌공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고 천령고을의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서원을 건립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를 가까이 따르던 선비들과 지우들도 그의 뜻을 크게 찬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도 크게 기뻐하는 서한을 보내 격려하였다.

고을의 선비들 중에는 서원 건립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전답을 선뜻 내놓기도 하고 가난한 선비들은 소금 한되, 쌀 한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성을 표시하여 서원 창건하는 일에 힘을 모아주어 용기를 가지고 일이 시작되었다.

영남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학맥에 속했던 함양의 선비들은 서원 건립을 계기로 함양의 학문이 줄기차게 뻗어 빛나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일이 중간쯤 진척되었을 때 서원 건립의 비용 조달에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엎친데 덮친격으로 억수같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루 이틀도 아닌 계속되는 비에 많은 피해까지 생기게 되었다. 모두들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개암선생이 꿈을 꾸게 되었다.
햇빛이 맑고 창창하게 비추는 세상에 갑자기 어둠이 밀려왔다.
하늘을 쳐다 보니 큰 산 만한 새가 하늘에 떠 있는 것이었다. 봉황이었다.
자세히 보니 봉황의 목에 백발과 하얀 수염을 느러뜨리고 있는 노인이 타고 있었다. 보통 노인이 아니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노인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개암선생, 비가 너무 많이 오지요.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요. 서원이 완성되기까지는 하늘의 때가 있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서원 건립에는 비가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정녕 닥칠것이오.”

“더 큰 문제라니, 무슨 문제가 닥친다는 말입니까?”

“그러하오.”

“그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개암선생, 그대를 시기하고 질시하여 음해 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오. 그러니 선생은 몸을 조심해야 할 것이오. 아무튼 서원 건립은 몇 년 더 늦어질 게 분명하오.”

하고 말한 노인은 봉황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개암선생은 꿈에서 깨어났지만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하였다.
보름여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자 다시 가다듬고 서원 건립에 열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을 하던 목수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기도 하고 나무에 깔려 죽는 일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해를 넘기자 크게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떠돌아 민심이 흉흉해져 갔다.
도대체 서원이란 주세붕 선생이 세운 죽계서원이 세워지긴 했지만 모두들 건축 경험이 없기도 하였다.

그동안 지원을 해 주었던 군수도 가버리고 신임군수마저도 서원 건립을 못마땅히 생각하였다.
개암선생에 대한 까닭없는 비방과 모략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하루는 선생이 촛불을 켜놓고 글을 읽고 있을 때였다.
툭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호지를 뚫고 화살이 날아들어 개암선생을 비끼어 벽에 꽃혔다. 머리를 앞뒤로 젖히면서 글읽는 버릇이 있어 머리를 앞으로 숙일 때 화살이 머리 위를 스쳐 다행이었다. 누군가의 음해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쁜놈들, 악이 선을 이길 수 있단말인가.”

하고 선생은 혼잣말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괜히 소란스럽게 하여 집안 식구들과 이웃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꿈속에서 지난번에 나타난 봉황을 탄 노인이 나타났다.

“여보시오! 개암선생, 몸을 피해야 할 것이오. 함양에 서원 건립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그대를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소이다. 어서 몸을 피해야 할 것이오. 서원 건립은 아직 때가 아니오.”

하고 말한 노인은 또 다시 어디론가 봉황을 타고 날아갔다.
개암선생은 하도 이상한 꿈인지라 이 모든 사실을 친구인 덕계에게 말하자 비상한 꿈이라며 그 노인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오도재를 넘어 지리산 등구동으로 들어갔다.
세속의 어지러움이 그를 산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던 것이다.

등구동은 20여 가구 정도의 한산한 산골 빈촌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사슴과 여우를 사냥하여 녹각과 여우가죽을 세금으로 바치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며 곶감과 숯을 팔아 생활하기도 하는 마을이었다.

그는 등구동 김씨집에 방을 얻어 생활하였다.
김씨는 선생의 용모를 보고 학식있고 덕망있는 선비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선생에게 딸린 머슴까지 데리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방에 틀어박혀 글을 읽고 짓기도 하고 이따금씩 산보삼아 산나물이나 약초를 캐러 다니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새벽에 김씨 부부는 말린 약초를 머리에 이고 숯을 한가마니 지고 오도재를 넘어 함양장으로 장을 보러 나갔다.
당시 마천에서는 남원장과 함양장, 그리고 하동장까지 가서 장을 보곤 하였던 것이다. 김씨 부부는 저녁때가 되어 돌아왔다. 그런데 김씨의 얼굴에 상처가 나 있었다.

“이봐요, 김씨 얼굴에 무슨 상처인가?”

하고 개암선생이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의 말에 김씨는 머뭇거릴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김씨의 아내가 훌쩍이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배가 고프고 해서 주막집에서 국밥을 먹고 이 이가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있는데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젊은 양반들이 무식한 촌놈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시비를 걸어와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런 고약한 건달들 같으니라구.”

다음날부터 개암선생은 김씨의 어린 아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였다.
학문을 깨치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개암선생은 더욱 정성을 다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김씨의 아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자 원근의 선비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마천에는 상민출신도 많았지만 한때는 높은 지체에 있었던 사람들의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난리를 피해 와 마천에 정착한 이들도 있었고 권력다툼을 피해 온 이의 후손도 있었다.
또한 역적으로 몰려 신분을 숨기는 사람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선비들은 지리산 등구동으로 몰려와 낮이고 밤이고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양진재를 지어 학문에 더욱 매진하도록 하였다.
또 양진재 주변에는 매란국죽을 심어 선비들의 성정을 더욱 심양케 하였다.
개암선생은 제자 선비들에게 학문만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선비들의 손에 괭이를 쥐게 하여 화전을 일구게 하였고 나무도 심게 하였다.
공부가 없는 날이면 시를 짓기도 하였다.

지초 난초 가꾸려고 어깨에 호미 메고
전원돌아 살펴보니 절만이 가시로다.
아해야 이 김 다 매기전에 해저물까 염려로다.

사립문에 개짓는다. 이 산촌 누가 오리
댓닢이 짓푸른데 봄새 소리로다.
아해야 날 찾아오거든 고사리 캐러가더라 하여라.

개암선생에 대한 온갖 모략과 비방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서원을 짓기 위해서 수동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떠나게 되자 그에게 학문을 배우던 선비들이 크게 슬퍼하였다.
이 산골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선생으로부터 다시 학문과 정신적 감화를 받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개암선생은 떠나갈 때 그동안 신세를 졌던 김씨에게 선생의 갓과 문집을 남기며 혹시 세리나 그 밖의 사람들이 와서 괴롭히면 갓을 보이며 자기의 갓이라고 하라고 일렀다.

사실 함양에서도 개암선생의 명성이라면 대단한 것이었다.

선생이 갓과 문집을 맡긴 것을 보면 선생의 인간애와 애민휼문 사상의 실천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김씨는 선생의 갓과 문집을 보관하면서 무식자로서의 괄시를 면했다고 한다.

김씨의 후예들이 문집을 내놓는다면 선생의 고고한 정신을 우리가 더 잘 알수 있을 것이며 국문학의 재조명에 더욱 빛을 발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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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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