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면

함양의 전설

의평의 망부목(望夫木) [젊은 선비들의 교훈이 된 부부]

마천면 의중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조선 선조때에 함양박씨 후손인 사신(士信)과 사성(士成) 두 형제가 이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을 동남쪽 삼백미터 지점인 현재의 쉰재들에 자리잡아 살다가 한 분은 의중 마을로 와서 살고 한 분은 의평마을로 들어와서 계속 대를 이어 살았다고 한다.
그 뒤 의평마을은 함양박씨 씨족들이 점점 번창하여 씨족마을로 변해갔다.

그런데 이 마을 한 가운데는 수령이 육백여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마을 사람들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참으로 보배로운 나무로 여기고 있다.

이 느티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리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산골 마을이지만 이 마을은 함양박씨가 모여 살면서부터 학문을 숭상하고 예의 범절을 엄히 가르치며 양반 행세를 톡톡히 하고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성실하고 성품이 온화하면서 미래에 큰 뜻을 품고 사는 한 선비가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학문에만 전념하는 이 선비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양식이 있는지 없는지 집안 형편은 관심 밖의 일이었고 온 정성을 글 읽는데에만 쏟았다.
학문을 낙으로 삼고 세월을 보내는 선비였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늘 책과 씨름을 하며 지내는 열심이었다.

그의 부인은 마음씨가 착했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군소리 없이 꾸려나갔다.
남편의 뜻을 따라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였다.
집안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남편이 성공하기만을 기대하고 모든 어려움과 고생을 감수했다.
고진감래의 교훈을 새기면서 남편의 뜻을 받들어 나갔다.

그 동안 많은 학문을 쌓아왔는데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과거에 응시할 기회가 왔다.
그의 부인은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노자돈을 마련하여 남편을 서울로 보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선비는 낙방하고 말았다.

몇 년 후에 또 기회가 왔다.
그는 또 다시 희망을 품고 천리길을 달려 한양으로 갔으나 이번에도 낙방하고 말았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씩이나 과거에 낙방하자 선비는 아내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마음씨 고운 아내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정성이 부족하여 남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달밝은 밤이면 마을 한가운데 서서 무성하게 뻗어가는 느티나무 앞에 가서 밤새워 기도를 드렸다.
‘저의 남편으로 하여금 느티나무처럼 뻗어나가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해 주소서. 지혜를 주시고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게 해 주소서. 차기에는 꼭 과거에 급제하게 해 주소서.’
참으로 지극한 정성이었다.

그 부인의 이러한 정성은 온 동네에 알려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여앉으면 박선비 이야기다.

“박선비는 너무 운이 없어.”

“박선비 부인은 밤마다 느티나무 앞에서 기도를 드린대.”

“그분의 정성이야 누가 따를 수 있을라고.”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데 다음에는 꼭 급제를 하겠지.”

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박선비는 머리를 싸매고 들어앉아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느덧 과거를 볼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석달 남짓 남았다.
마음은 초조해온다. 한양으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에는 꼭 급제를 해야지. 그래서 아내의 정성에 보답해야지'
그는 단단히 마음으로 별렀다.
부인 보기에는 미안하고 마을 사람들 보기에도 민망스러웠다.

“여보, 이번에는 마음을 가다듬어 잘 해보세요.”

“미안하오. 이번에도 실패하면 집에 돌아올 면목도 없겠소.”

“이번에는 되리라 믿습니다. 염려말고 다녀오세요. 몸 건강하고 무사히 다녀오기를 빌겠습니다.”

박선비는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섭섭한 이별을 나누고 무거운 발길을 한양으로 옮겼다.
남편을 천리길 머나먼 곳으로 떠나 보내는 부인의 마음은 천길 만길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노자도 변변치 못하면서도 불평없이 떠나는 남편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다.

박선비는 험준한 산을 넘고 가시밭 길을 헤치며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난한 선비의 과거길은 너무나 험준하였고 고달팠다.
그러나 아무리 고달파도 청운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참았다.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면 용기가 솟아나고 피로가 확 풀렸다.
하루는 고개를 넘다가 깊은 산골에서 도적들을 만났다.

“여보게 젊은 선비, 가진 노자는 얼마나 있지?”

“이게 무슨 무엄한 짓이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빈 털털이 주제에 웬 큰소리야. 너같은 놈은 죽어야 해. 그래야 우리 신변이 안전하거든.”

선비는 비정한 도둑들에게 그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뜻을 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갔다.

한편 선비의 부인은 선비가 한양으로 길을 떠난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느티나무 앞에서 정성을 드렸다.
느티나무 앞에 정안수를 떠다 놓고 지성으로 기원하였다.
거의 매일 느티나무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부인의 일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달이 지나가고 두달이 지나가고 반년이 가고 일년이 다 가도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부인마저 지쳐서 그만 병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느티나무 앞에 나와 느티나무를 끌어안고 세상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장사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 부부를 불쌍히 여겨 느티나무 앞에서 두 부부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주기로 하였다.

뜻을 이루지 못한 가난한 선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을의 젊은 유생들은 이 느티나무 아래서 시를 읊기도 하고 학문을 겨루기도 하였다.
죽은 선비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학문을 숭상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마을에 공부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젊은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다. 수차례에 걸쳐 이 마을 젊은이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정월 초삼일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 선비부부의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지냈다.
유생들이 모여 시부를 읊고 학문을 서로 겨루는 행사가 계속되었다.

세월이 지나자 그때의 추모제는 평화제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에 풍년과 평화를 가져다 주며 마을 청년들에게는 청운의 뜻을 품게 만드는 길목(吉木)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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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9.18 1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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