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면

함양의 전설

영원사의 황소목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오다]

영원사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 중턱인 해발 920미터에 위치한 절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시대에 지었다고 하며 그 당시 고승이었던 영원대사가 이룩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영원사라고 불렀다 한다.

한때 내지리에서는 제일 가는 이름있는 사찰이라고 했다.
지금은 명성만 지닌 채 초라한 절이 되어 스님 한 분만이 폐허가 된 사찰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 절의 규모로서는 너와로 된 선방이 9채에 100간이 넘는 방이 있었으며 이 곳에서 도를 닦은 고승이 많았다고 한다.
고승들이 거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보실안록을 보면 부용영관, 서산대사, 청매, 사명대사, 지안, 설파상언, 포광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 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산대사가 도를 닦기 위해 불제자로 입문할 때 남원군 산내면에 위치한 달궁의 황령사에서 삭발하고 그 후 이곳의 영원사로 들어와 12년간 도를 닦은 곳이기도 하다.

이절을 창건하게 된 내력에 얽힌 설화가 있다.
영원대사가 소년시절에는 범어사에서 동자승으로 있었는데 그의 스승과 제자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정의가 깊었다는 것이다.

영원의 불가 입문 동기는 스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산속에 들어가 공부를 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스승과 작별하고 범어사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그날 밤 영원대사의 꿈에 ‘길을 떠나더라도 목적지를 향해 떠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되느니라.’ 하고 계시가 있었다.

꿈을 깨어난 영원은 하도 기이한 꿈이라 스승에게 이야기도 못하고 현몽대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을 만큼 깊은 정이든 스승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나기는 했지만 스승을 두고 가는 영원의 가슴 속은 어떠했으랴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하였다.

그러나 그 곳을 잊을 수 없어 고개를 넘다가 마지막으로 범어사를 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순간 범어사에 있던 스승은 시커면 구렁이로 변하고 말았다.
뒤를 돌아본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토굴을 만들고 혼자서 불법을 공부하며 8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자신의 도가 대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며 자리를 옮겨 공부해 보려고 토굴을 나와 길을 걸었다.

그 때 풀밭에서 물리지 않는 낚시로 육지에서 낚시를 즐기는 이상한 노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 노인이 풀밭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2년만 더 낚시질을 하면 큰 고기가 낚일 터인데...”

꼭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낚싯대를 놓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영원은 번득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이 있어 가던 길을 되돌아 섰다.
다시 토굴로 돌아와 열심히 공부하여 2년을 채워서 십년의 공부를 계속했다.

십년의 각고 끝에 도를 깨친 대사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득도한 대사는 이 기쁨을 스승에게 알리고 싶고 스승을 뵙고 문안드리고 싶었다. 영원대사는 봇짐을 싸지고 범어사로 발길을 옮겼다.

범어사로 돌아온 영원대사는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뒤늦게 그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헛간에 살고 있는 시커먼 구렁이가 자기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죽을 쑤어 주며 공양을 계속했다.

대사는 구렁이를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이따금씩 구렁이가 허물을 벗고 사람으로 환생하라는 불공을 드렸다.
그럴 때마다 구렁이는 바위에다 머리를 찧고 스스로 죽어갔다.
결국 구렁이는 죽고 말았다.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원대사는 범어사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는 죽은 구렁이의 영혼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자신의 수도하던 지리산으로 들어던 중 어느 마을 앞을 지나게 되었다.
길에서 들로 나가는 한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대사는 그 부부에게

“열 달 후에 아기가 태어날 것인데 그 아이에게 스승의 혼을 넣어 드리니 그 아이가 일곱 살이 되거든 나에게 데리고 와서 공부를 해야 하오. 만약 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명이 짧아져서 일찍 죽고 말 것이오.”

라고 말했다.

“네, 대사님 말씀대로 꼭 시행하겠습니다.”

“잊지 마시오. 내 말을.”

“명심하고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사의 말을 듣고 그 부부는 대사에게 약속을 하였다.

대사는 지금의 영원사 터로 들어놔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칠년이나 걸려서 완성하게 되었다. 절을 짓는데에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지 모른다.

겨우 절이 완성되자 약속한 대로 동자 하나가 절로 들어왔다.
이 동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날이 학문이 늘어가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욕심이 너무 많았다.
그는 욕심대로 그 많은 공부를 한꺼번에 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동자를 방 안에 가두고 바깥에서 문을 잠그며 문에다 구멍을 뚫어놓고

“이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공부나 하여라.”

하고 일러주었다.

그 후 수년이 흘러 그 동자의 눈이 영롱해지면서 우뢰와 같은 소리와 함께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 들어오지 않는가! 그러자 동자는

“스님, 황소가 들어옵니다.”

하고 소리치며 넘어지는 순간 동자는 득도를 한 것이다.
선생의 일을 알게 된 동자는 자기의 스승이 전생에는 자기의 제자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동자 자신은 전생에 면학 소승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위와 같은 전설로 영원사 부근에는 황소목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이런 것을 가지고 고찰이라 할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이 곳의 까마귀와 까치도 불경을 외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덕망이 높은 스님들이 영원사를 찾았다고 한다.

600여평의 대지에 부도지가 여섯 개나 있어 오랜 세월에 씻기고 깎여 영겁 속에 영원사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여 주고 있다.

특히 엽송설화 삼십권을 기록했다는 구곡 각운대사의 사리를 보존했다는 상무주암의 필단사리 삼층 석탑이 빛을 발했다는 이야기등도 지난 날의 유서깊은 영원사의 선풍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가 보아도 깊은 산속의 절이 도를 닦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원사가 그 위용을 잃게 된 것은 시대의 영향이라 하겠다.
여순반란사건 및 지리산 공비들과 깊은 연유가 있는데 나라가 혼란한 그 당시에 완전 소실되었다.

여순 반란사건 이후 반란군이 아군의 공격에 쫓겨 이 곳에까지 찾아와 절을 아지트로 삼고 주민들을 괴롭히자 아군이 작전상 불태워 없애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그후 1971년에 중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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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9.18 1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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