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면

함양의 전설

벽송대사(碧松大師) [한 대사의 도 닦은 이야기]

어느 지방 어느 고을을 가나 사찰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다.
이 이야기도 그러한 류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가면 벽송사라고 하는 유명한 절이 있다.
이 절을 지은 벽송대사의 행적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전 전라북도 부안에서 부안 송씨 가문의 한 집안에서 송지암(宋芝岩)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여 열 살 이전에 벌써 사서삼경을 다 읽었으며 스무살이 되던 해 어느 따뜻한 봄날에 조정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방이 붙었다.

지암은 무과에 응시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무사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장원급제를 하여 장군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하여 외세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다.
중국의 명나라에서도 자주 트집을 잡아 괴롭혔고 국경의 침범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또한 북벌 계획을 시도하여 적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장군은 혹독한 혹한 속에서 국경지대를 수비하다가 장검을 집고 서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번뇌 속에서 시름하다가 문득 자신의 나아갈 바를 결정짓기 위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방장산 어디에선가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法戒正心大師)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함양군 마천면에 소재하는 지리산에 들어가 수십일 동안 헤매던 중에 드디어 지금의 추성리 광점동에서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법계정심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한 다음 지암은 지금까지 번뇌속에서 방황하던 자신이 걸어 온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자 대사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지암은 너무나 기뻤다.
그날부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법계정심대사는 이미 불문을 떠나 속세에서 부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식솔들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싸리 제품인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그 광주리를 판돈으로 생활을 근근히 해결해 왔다.

대사는 매일 지암을 머슴처럼 부리며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채취해와서 광주리 만드는 것만 가르치고 다른 문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지암은 세월이 갈수록 안타까웠다.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음을 알고 법계정심대사의 문하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대상에게 뜻을 전하니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 하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암은 그곳을 떠나 정처없이 또 다른 스승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마천면 의탄리 속칭 살바탕에 이르자 법계정심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 지암은 그길로 다시 강점에 계시는 대사 곁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대사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묵상을 하더니 갑자기 두손을 놓이 하늘로 치켜 들더니 지암은
'이제 도를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지암은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슴없이 받았다고 대답을 하였다.
대사는 ‘지암은 이제 도를 받으라’고 다시 소리치며 손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 시각부터 지암은 물욕과 정욕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벽송대사로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하여 지금의 광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의탄리의 속칭 살바탕에서 광주리점으로 되돌아가 도를 받고 벽송대사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벽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암이 대사로부터 깨달음을 받은 지 삼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벽송대사는 이곳에 조그만한 절을 짓고 벽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입적한 대사의 시신을 화장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대사의 수제자인 환성대사가 다시 절을 짓고 석탑을 세워 벽송대사의 유품인 염주와 사리 등을 안장하여 오래도록 보존하여 왔으나 6. 25 동란 중 사찰이 소실되고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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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9.18 1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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