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

함양 백용성 선사 화과원 유허지

함양 백용성 선사 화과원 유허지

  •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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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화과원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인 진종 백용성(白龍城)선사가 1929년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 30ha의 토지를 매입하여 과수원을 조성하여 선농불교(先農佛敎)를 주창하는 한편 이 곳을 거점으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을 한곳으로 당시에는 군산항을 거쳐 중국의 상해와 용정등지로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중요한 거점 기지로 활용되었던 곳이며 또한 한국 근대 불교의 대중화와 국민 계도를 위한 선농사상과 승려의 반농반선(半農半禪) 실천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후 6.25전란을 겪으면서 화과원은 폐허화되어 당시에 심어졌던 과실나무만이 남아 있는곳을 근년에 함양군과 복원회가 중심이 되어 복원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현재는 선사가 머무르던 요사채 1동을 복원하여 놓은 상태이다.

백용성 선사는 고종황제 원년인 1864년 5월 8일(음력) 인근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서 아버지인 수원 백씨 남현공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사의 세속명은 상규(相奎)이고 법명은 진종(震鐘)이며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14살이 되던 1877년에 부처님이 나타나 자신을 가르치는 꿈을 꾸고서는 부모 모르게 남원시 교룡산성에 있는 덕밀암에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하였는데 부모의 만류로 환속하였다.
16세가 되던 1879년에 부모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덕밀암 주지스님의 인도로 해인사 극락암에 재출가하여 화원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모시고 공부를 하였다.
이 후 전국 각지의 명산 고찰을 다니면서 수도를 계속하였으며 해인사에 다시 돌아와서는 팔만대장경판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서는 황실에 부탁하여 2만냥의 내탕금을 지원 받아 보수하기도 하였다.

1911년에 대중을 위하는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서울에 대각사를 세우고 각 지역에 선포교당을 세워 대중 포교를 통한 망국민의 민족의식을 키우기 위하여 한때 북청에서 금광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여 계획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3.1운동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출옥후에는 대각사에 삼장역회를 설립하여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불교가 대중속에서 행동하는 불교로 전환되어야 한다면서 산속에 있는 불교의 전통을 깨고 도심지에 절을 짓고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선사는 선농불교를 이루고 만주의 독립투사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2개소의 선농당을 운영하였는데 1개소는 중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용정에 연길농장을 만들어 운영토록 하였으며 나머지 1곳은 이곳 함양군 백전면의 화과원이다.
화과원 선농당은 선사가 수만평의 황무지와 임야를 개간하여 과수, 야채, 감자등을 재배하면서 인근 빈농의 자녀들을 자급자족의 정신으로 집단 교육하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각 지역에서 모금된 독립자금을 해외의 독립투사들에게 보내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화과원의 선농당은 1936년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선사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1934년부터 가중되기 시작하여 1936년에는 대각사를 범어사 경성포교당으로 개칭하였으며 1938년에 대각교 창설 18년만에 강제 해산되었으며 선사의 모든 활동은 봉쇄되었다.
그러나 선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포교활동을 계속 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940년 2월 24일 문도들에게 '오늘 내가 열방에 들고자 한다'면서 열반을 예언하고 목욕재계한 다음 가사를 입고 앉아서 입적하였다.
선사의 인생은 14세에 입문하여 평생을 불자로 살아왔다는 점이며 또하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사실이다, 선사는 자신의 굳건한 종교관에 의해 초년, 중년에는 불교 대중화운동을 펼쳣고 중년 이후의 여생은 불교를 통한 항일운동에 진력했다는 것으로 요약되며 대각사상 연구원이 발족되어 선사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재조명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며 1998년도에는 대각사상학술발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복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한글유공자로 은관문화훈장의 추서와 함께 감사패 수여되었으며 저서로는 용성선사어록, 귀원정종,수심론등이 있다.

지정번호

기념물 제 229호

위치 및 주변관광

전체

관광지

문화재

음식점

숙박시설


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최종수정일
2023.09.25 14: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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