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Q&A

사근산성 인근 피내(혈계)관련 질문

작성일
2012-09-10 09:49:51
작성자
이상두
조회수 :
1343

[답변]사근산성 인근 피내(혈계)관련 질문

작성일
2012-10-08 18:02:20
작성자
관리자
안녕하세요. 우선 함양군에 관심을 가져주신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답변이 늦은 점에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비록 부족한 점이 있긴하나 최선을 다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1. 이 내용에 나오는 혈계, 피내의 지명이 어디인지?
    - 혈계 혹은 피내라는 명칭은 작성자 님이 남기신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분전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인 죽산천을 다르게 일컫는 말입니다. 즉, 죽산천이라는 강을 다른 이름으로 혈계 혹은 피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려 우왕 6년에 왜구가 500여척의 배를 타고 영남땅에 침입하여 상주부를 불태우고 성주를 지나 이곳 사근부락 (수동의 옜지명)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삼도 원수 배극렴등 9장수를 보내어 왜구를 토벌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싸움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박수경,배언등 2명의 장수와 군사 500여명이 전사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죽은 군사들의 피로 말미암아 강은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마치 피의 강처럼 붉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피내 즉 혈계이다


2. 현재의 지명에도 두 명칭(혈계,피내)가 쓰이는 곳이 있는지?
- 현재에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분전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인 죽산천을 혈계 혹은 피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법적인 지명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나, 구전으로 내려오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혈계 혹은 피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3. 두 명칭과 관련한 역사속의 사료가 있는지? 가 궁금합니다.
- 혈계 혹은 피내라는 명칭이 실린 역사서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1741~93)의 저술을 망라한 시문집인 "청장관전서"가 있습니다.
아래는 "청장관전서"에서 혈계 혹은 피내가 나오는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고려 신우 6년(1380) 경신에 왜놈 배 5백 척이 진포에 정박하고 삼도를 노략질하되 상주부의 창고를 불지르고 경산을 거쳐 사근역(지금의 함양)에 주둔했다. 삼도원수 배극렴 등 아홉 장수가 왜(왜)와 사근역의 동쪽 3리쯤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박수경과 배언두 원수가 전사하였고, 전사한 사졸들이 5백여 명이나 되어 냇물이 다 붉었으므로 지금까지도 피내[혈계]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싫어서 국계라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때에 감무였던 장군철이 산성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도륙당한 바 되었으므로, 왜적이 그로 인하여 남원으로 향하여 인월역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산성이 허물어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는데 성종조에서 다시 쌓았고 지금까지 다시는 수리하지 않았다.

이 성을 두고 이첨(리첨)은 이런 시를 지었다.
운봉산 아래 가을 바람 일찍 불어 / 운봉산하추풍조
밝은 햇볕 찬 기후에 나뭇잎 말라질 제 / 일담천한목엽고
섬 오랑캐 우리 군사 패배시켜 / 시시도이패아군
함양 들판 푸른 풀에 붉은 피를 뿌렸네 / 혈천함양원상초
양부의 원수 진전에서 전사하니 /량부원수진전망
사졸들 미천한 몸 보전하기 어려워라 / 사졸미구난자보
슬픈 호드기 두어 소리에 장부 눈물 흘리니 / 비가수성장부루
맹세코 나라 수치 늙기 전에 씻으리 / 서설국치급미로
남쪽으로 가는 제장들아 군사 없는 이 그 누구뇨 / 정남제장수무군
깃발 느릿느릿 정도를 되돌아오네 / 정기완완회정도

유호인(유호인)은 이런 시를 지었다.
사근성 경계에 음산한 구름 일어나니 / 사근성반기음운
땅 귀신 밤마다 울고 비는 어지럽게 내리네 / 곤령야읍우분분
경신년에 죽은 넋들 흐느껴 우는 소리 / 경신만귀추추곡
당시의 장 사군을 한하는 듯하네 / 사한한당시장사군

다음으로 혈계 혹인 피내가 나오는 역사서로 조선 영조 때 안정복이 편년체로 지은 "동사강목"이 있습니다.
아래는 "동사강목"에서 혈계(피내)가 나오는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왜적이 진포의 패전 이래 더욱 독기를 품어 황간ㆍ화령지금은 상주에 속해 있다. 등 현을 돌아다니며 침구하고, 상주ㆍ선산 두 주를 불지르니, 삼도(삼도 경상ㆍ전라ㆍ양광)의 연해 지방은 쓸쓸히 텅 비어, 왜구의 환이 있은 뒤 이렇게 극심한 적이 없었다. 우리 태조를 찬성사로 삼아 삼도를 순찰하게 하고, 찬성 변안열)을 부로 삼았으며 평리 왕복명ㆍ우인열 등 7원수가 모두 명을 받게 하였다. 군사가 장단을 나가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는데, 점치는 자가 전승할 조짐이라 하였다.

9월 우리 태조가 운봉에서 왜적을 크게 깨뜨리고 그들의 우두머리 장수를 베었다.

왜적이 상주로부터 와서 경산을 거쳐 사근역(지금의 함양) 동쪽 13리에 있다. 에 주둔하자 삼도원수 배극렴ㆍ지용기ㆍ정지 등 아홉 장수가 역 동쪽 3리 지점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박수경(박수경)ㆍ배언(배언) 두 원수는 전사하였으며, 죽은 사졸도 5백여 인이나 되어 냇물이 모두 붉은 빛으로 되니 피내[혈계]라고들 하였다.

※ 1966년 국가사적 제 152호로 지정된 함양군 수동면 연화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사근산성은 함양읍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동시에 서부경남에서 호남지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였기에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지역이고 지리적으로 교통과 군사상 요충지였습니다.
그리고 혈계(피내)는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에서 화산리로 흐르는 죽산천을 다르게 부르는 말로 연화산을 감싸돌며 흐르는 강입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사근산성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고 났고 이들의 피가 연화산을 타고 내려와 죽산천으로 흘러들어가 핏물로 물들었기에 혈계(피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조금은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늦은 답변 다시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며, 앞으로도 함양에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담당
문화관광과 관광기획담당 (☎ 055-960-4520)
최종수정일
2024.05.13 17: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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