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 게시물 검색 제목 내용 검색 총 64 건의 글이 있습니다. (6/7 페이지) 은행정 마을의 은행목 [마을의 수호신이 된 은행나무] 서하면 소재지인 송계마을에서 남서쪽으로 골짜기를 쳐다보면 골짜기 중턱에 거대한 나무가 마을을 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서하면 운곡리 은행마을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감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나무들이 이 마을을 덮고 있지만 유독 은행나무만이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우뚝 솟아 울창하게 뻗어서 돋보이게 된다. 나무의 높이는 약 40m나 되고 둘레가 13m나 되는 거대한 은행나무로서 그 수령은 잘 알 수 없으나, 이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오는 사람의 25대 후손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하니 약 700년 내지 800년의 수령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나무가 서 있는 마을의 이름도 이 나무로 말미암아 은행마을 또는 은행정이라고 불리게 된 것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과 더불어 그 역사는 이루어지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풍수지리설에 ... 황석산성 피바위 [옥녀부인의 장렬한 죽음] 1592년의 임진왜란이 5년간이나 계속되는 동안 이 나라의 참상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화친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서로의 명분을 주장하다가 회담이 결렬되고 왜적은 1597년(선조30년)정유년에 재차 침략을 단행했다. 남해안으로 상륙한 왜적은 곽재우 장군의 요새인 창녕 화왕산성을 돌아 초계와 합천을 거쳐 진격했다. 전주와 남원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올라오면서 황석산성으로 쳐 들어왔다. 당시 체찰사로 있던 이원익은 안의, 거창, 함양 등 3개읍의 백성들과 군사를 모아 황석산성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그 당시 안음 현감으로 있던 곽준은 직접 관민을 동원하여 성을 수축하고 병기와 기재를 정비하여 싸움에 대비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가족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와 곽준과 힘을 합쳐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결의하고 북상하는 ... 육십령 고개 [도적떼가 많았던 고개] 바람도 울고 넘는다는 육십령 고개는 해발 734미터의 험산준령이다. 덕유산을 옆에 끼고 소백산맥을 가로 질러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을 이어주는 길이다. 죽령, 조령, 추풍령, 팔령과 함께 소백산맥의 대표적인 고개이다. 본래 이 영마루는 안의군에 속했는데 안의군은 신라 때에는 마리현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안현, 안음현, 안의현, 안의군으로 개칭되어 지금의 거창군 북상면, 위천면, 마리면을 포함한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었으나 1914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의군이 폐지되고 이곳 육십령은 함양군에 편입되게 되었다. 이 고개를 육십령이라고 하는 데는 세가지 설이 있다. 첫째의 설로는 안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가 육십리요, 장수 감영에서도 이 고개까지가 육십리라서 육십령이라고 명명했다는 설이다. 둘째 설로는 이 고... 일시에 거지가 된 부자 [거지들을 막기 위해 함박산 주름을 끊음] 인간이란 남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고 남에게 베풀 줄 알아야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모르고 남을 도울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처럼 불쌍하게 느껴진다. 명심보감에 하루라도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복은 비록 금방 나에게 오는 것을 볼수 없지만 재앙은 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고 하루라도 악한 일을 하게 되면 재앙은 금방 나에게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해도 복은 나에게서 이미 떠나가고 있다는 말이 있다. 풍성하게 잘 살면서도 남에게 베풀기를 꺼리는 사람은 있는 복도 나가게 마련이다. 서상면 오산마을에 가면 마을 좌측을 돌아 마을을 감싸면서 돌아가는 끝부분이 약간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산을 함박산이라고 부른다. 이 함박산이 마을을 품어 감싸는 듯한 오산마을에는 1년에 쌀 천석을 거두어 들이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 효자 박준영 이야기 [자신의 피로 부모님의 병을 치료] 함양 고을에서 북쪽으로 가면 안의현에 서상동 옥산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 밀양 박씨의 후손인 박창진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아들이 없음을 늘 한탄하며 지내고 있었다. 박선비 부인이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백일 기도를 정성껏 드린 보람이 있어 이듬해 옥동자를 낳았는데 기쁨에 넘친 부부는 이름을 박준영이라고 짓고 애지 중지 키우며 행복한 생활을 해 나갔다. 준영은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남달리 영특하고 효성스러워 많은 사람들로부터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준영이 열네살 되던 해 아버지 박선비가 시름시름 앓아 자리에 눕더니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좋다는 약을 팔방으로 구해서 달여 드렸으나 별 효험을 얻지 못하고 병은 악화되어 갔다. 아버지를 꼭 살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과 효성에 아픔도 잊은 채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잘라 ... 비네바위의 눈물 [떠돌이 화공과 양가집 규수의 비련 백전면 경백리 능경마을 서쪽에는 비네바위(비녀바위)라는 벼랑이 있고 그 벼랑 아래는 소(沼)가 있다. 그런데 이 비네바위에는 칠월 칠석이 되면 물방울이 생겨나와 밑의 소로 뚝뚝 떨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물방울을 옥이라는 여인의 눈물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 이 고을에 옥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김진사의 무남독녀였기에 그야말로 옥이야 금이야 귀하게 자랐다. 옥이는 나이가 들면서 반개도화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숲속의 샘처럼 맑은 눈동자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는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향기롭고 은은하여 인근의 뭇총각들로 하여금 밤마다 터지는 한숨으로 잠 못이루게 하였다. 옥이의 부모들이 옥이의 혼처를 물색하고 있었고 어느정도 가닥을 잡고 있었다. 친척들은 옥이에게 넌지시 농을 걸곤 하였다. “옥아, 어서 시집가고 싶지 않... 소금장수가 빠져죽은 소(沼) [바람둥이 소금장수] 백전면에는 백운산(1278m)이 있는데 산이 높고 아름다워 함양에서 일일 등산코스로 적합한 곳이다. 이 산은 함양을 기름지게 적셔주는 위천수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산 밑에는 백운리와 운산리 두개의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도 백운산 밑에 있다하여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그 중 운산에서 중기마을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소(沼)가 하나 있는데 이 소는 '소금쟁이소'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였다. 옛날에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소금장수가 이 마을에 소금을 팔러 종종 오곤 하였다. 몸집이 크고 장골인 이 소금장수는 일년에 두어번씩 소금을 팔러와 한 사나흘씩 묵고는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이 소금장수는 마을의 아녀자들에게는 귀한 손님처럼 기다려지는... 의적이 살던 도둑놈골 [탐관오리와 호족들에 대한 분노] 백전면 오천리 내천마을의 북쪽 골짜기로 올라가면 「도둑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공인된 지명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지명이기도 한 이 골짜기는 옛날에 도둑놈들 '정확히 말하면 의적들'이 둔치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지고 있다. 옛날 이 도둑놈골에는 십명 남짓한 의적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벼슬아치들이나 양반들, 그리고 부자들의 등살에 못 이겨 그들 면전을 피하여 산속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뜻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한 덩어리로 뭉치게 되었다. 이들 도둑들은 죽창이나 칼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것들은 살육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호신용이었다. 이들 도둑들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재물을 빼앗는 좀도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의적이었다. 그들은 탐관오리들의 관아나 양반들, 부자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들이 ... 뇌계의 잉어와 성종임금 [유호인 선생의 충성심] 함양읍 상림을 지나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함양읍과 병곡면의 경계 지점에 조그마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도덕바위라 한다. 이 바위는 뇌계 유호인선생이 즐겨 다니던 낚시터로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충효의 표본이며 조선조에 손꼽히는 문장가로서 성종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뇌계 유호인 선생이 아직 벼슬길에 나서기 전의 일이다. 어느 늦은 봄 날 긴긴 해가 저물어 갈 때에 강물에 드리우고 있던 낚싯대가 별안간 꺽일 듯이 힘차게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가까스로 낚시를 들어 올려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두자가 넘는 큰 잉어가 낚시에 걸려 퍼득이고 있었다. 석양을 받아 번쩍거리는 기막힌 큰 잉어를 본 선생은 너무나 기뻤다. '이렇게 좋은 생선을 내 어찌 감히 사사로이 먹을 수 있으랴, 상감께 진상을 해야겠다.' 하고 언덕에서 띠풀을 뽑아 조그마한 망... 송난소나무 [용의 모양으로 키운 소나무] 병곡면 도천리 도천 마을에 있는 송난 소나무는 직경이 80cm요, 가지는 사방 15m 크기의 소나무로서 이 나무는 지금부터 250여년전 도천 마을 하씨 문중에서 심었다고 하는데 그 나무를 심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좋은 집터를 가지면 자손이 번창하고 벼슬을 한다는 말이 전한다. 하씨 문중의 한 사람이 풍수지리에 도통한 명인의 말을 따라서 좋은 집터에 집을 지었다. 또 그 명인은 샘을 파고 그 곁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기를 권했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그 하씨가 아침 저녁으로 이 샘물을 떠 놓고 하씨 문중의 벼슬을 위하여 축운을 드렸다고 한다. 그러고도 정성이 부족할까 염려하여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을 믿고 샘물 곁에 있는 소나무를 용의 모양으로 자라도록 가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자손손이 나무를 용의 모양으로 자라도록 가꾸... « ‹ 1 2 3 4 5 6 7 › » 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7 13:10:56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매우 만족함(5점) 만족(4점) 보통(3점) 불만족(2점) 매우 불만족(1점) 의견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