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표연말 (表沿沫) : 1449~1498
- 작성일
- 2016-07-15 14:44:49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992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이며 본관은 신창이고 표계 의 셋째 아들로 함양에서 태어났다.
공의 형제 3명이 모두 급제하여 맏형은 현감을 둘째형은 부사를 지냈다.
공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로써 1471년(성종2)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봉교로 재직중 1478년 신임관리들로부터 주연을 대접 받았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482년 복직하여 공조좌랑이 되고 1486년 장례원 사의로서 문과 중시에 다시 급제하여 장령,시독관, 사간등을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1) 응교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6년에는 직제학으로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였으며, 이후 승지, 대사간을 지냈다.
소릉(문종비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에 대한 사항을 사초에 적은것과 스승인 김종직의 문장을 미화하였다는 죄목으로 무오사화때 장 100대에 1천리밖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던중 은계역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으며, 1504년(연산10) 폐비 윤씨로 인하여 발생된 갑자사화때 부관참시 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써 유호인등과 함께 성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훗날 복위되어 함양의 구천서원, 상주시 함창의 임호서원, 의령의 숭보사당에 제향되었고 의령군 유곡면의 표씨 제실에 사적비가 있다.
훗날 중종대왕이 직접 제문을 지어 추모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저서로는 남계집이 있다.
공의 형제 3명이 모두 급제하여 맏형은 현감을 둘째형은 부사를 지냈다.
공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로써 1471년(성종2)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봉교로 재직중 1478년 신임관리들로부터 주연을 대접 받았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482년 복직하여 공조좌랑이 되고 1486년 장례원 사의로서 문과 중시에 다시 급제하여 장령,시독관, 사간등을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1) 응교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6년에는 직제학으로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였으며, 이후 승지, 대사간을 지냈다.
소릉(문종비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에 대한 사항을 사초에 적은것과 스승인 김종직의 문장을 미화하였다는 죄목으로 무오사화때 장 100대에 1천리밖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던중 은계역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으며, 1504년(연산10) 폐비 윤씨로 인하여 발생된 갑자사화때 부관참시 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써 유호인등과 함께 성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훗날 복위되어 함양의 구천서원, 상주시 함창의 임호서원, 의령의 숭보사당에 제향되었고 의령군 유곡면의 표씨 제실에 사적비가 있다.
훗날 중종대왕이 직접 제문을 지어 추모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저서로는 남계집이 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