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종도 (趙宗道) : 1537~1597
- 작성일
- 2016-07-15 14:43:21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921
호는 대소헌(大笑軒)이고 자는 백유(伯由),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며 본관은 함안이다.
1537년(중종32년)에 태어나서 1597년(선조30)에 안의현 황석산성에서 현감 곽준과 함께 적탄에 맞아 장렬히 최후를 마친 순국의사이다.
공은 10세에 은거하는 군자 정두 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남명 조식 선생으로부터 다시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13)에 나이 22세 되는해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첫 벼슬로 안기도 찰방이 되었다.
1585년(선조18) 양지(수원)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재임시에는 선정으로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으며, 일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쉬고 있을 때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창의문이라는 격문을 배포하여 많은 의병을 모으는등 글재주가 뛰어나 김성일의 그늘에서 의령군수를 임명받았으나 이미 곽재우의 의병이 일어난 것을 알고 의령을 물러나왔으며, 안음(안의)의 현감으로 기용되었고 그 후 함양군수로 영전되었으나 지병으로 사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시 의병을 모아 안음 현감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을 사수하기로 의논할시 김해부사 백사림이 가담하므로 가족과 함께 산성으로 들어왔으며 산성을 사수하기로 결의하였으니 이때가 공의 나이 60이었다..
1597년 8월 18일(음력) 달 밝은 밤 전투에 임해서 백사림이 문을 열고 도망을 하였고 왜장 가등청정이 이끄는 적 3만명과 대치하였으니 숫자로 열세였던 아군 500명은 끝내 패전하였으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숙종조에 황암사당에 배향되었고 함안의 덕암서원에 제향되었다.
1537년(중종32년)에 태어나서 1597년(선조30)에 안의현 황석산성에서 현감 곽준과 함께 적탄에 맞아 장렬히 최후를 마친 순국의사이다.
공은 10세에 은거하는 군자 정두 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남명 조식 선생으로부터 다시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13)에 나이 22세 되는해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첫 벼슬로 안기도 찰방이 되었다.
1585년(선조18) 양지(수원)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재임시에는 선정으로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으며, 일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쉬고 있을 때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창의문이라는 격문을 배포하여 많은 의병을 모으는등 글재주가 뛰어나 김성일의 그늘에서 의령군수를 임명받았으나 이미 곽재우의 의병이 일어난 것을 알고 의령을 물러나왔으며, 안음(안의)의 현감으로 기용되었고 그 후 함양군수로 영전되었으나 지병으로 사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시 의병을 모아 안음 현감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을 사수하기로 의논할시 김해부사 백사림이 가담하므로 가족과 함께 산성으로 들어왔으며 산성을 사수하기로 결의하였으니 이때가 공의 나이 60이었다..
1597년 8월 18일(음력) 달 밝은 밤 전투에 임해서 백사림이 문을 열고 도망을 하였고 왜장 가등청정이 이끄는 적 3만명과 대치하였으니 숫자로 열세였던 아군 500명은 끝내 패전하였으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숙종조에 황암사당에 배향되었고 함안의 덕암서원에 제향되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