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 희 (梁 喜) : 1515~1581
- 작성일
- 2016-07-15 14:25:39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581
조선 중기의 정치가인 선생의 자는 구이(懼而)이고 호는 구졸암(九拙庵)이며 청백리 양관의 손자로서 본관은 남원이다.
중종때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을 거쳐 1568년(선조1)에 예빈시정으로 있으면서 명종 재위 22년의 역사를 기록하는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하였다.
1573년(선조6)에는 사간을 거쳐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1580년에는 판결사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1581년에 동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의 조회에 참례하고 객관인 옥하관으로 돌아가서 머무르다가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 황제가 예부시랑을 보내어 제문을 보냈다.
중종은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면서
“양희의 아들 2명과 호상에게 말을 주어 내려보내고, 6장씩 붙인 유둔(기름을 먹인 종이) 3부, 쌀과 콩 20석, 종이 70권, 공석(벼를 담지않은 빈가마) 90번, 석회 30석을 별치부로 내리라.”라고 전교하셨다
양희는 이조판서 이후백 및 예조판서 노진과 함께 천령삼걸로 일컬어졌다.
그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01년 구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중종때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을 거쳐 1568년(선조1)에 예빈시정으로 있으면서 명종 재위 22년의 역사를 기록하는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하였다.
1573년(선조6)에는 사간을 거쳐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1580년에는 판결사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1581년에 동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의 조회에 참례하고 객관인 옥하관으로 돌아가서 머무르다가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 황제가 예부시랑을 보내어 제문을 보냈다.
중종은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면서
“양희의 아들 2명과 호상에게 말을 주어 내려보내고, 6장씩 붙인 유둔(기름을 먹인 종이) 3부, 쌀과 콩 20석, 종이 70권, 공석(벼를 담지않은 빈가마) 90번, 석회 30석을 별치부로 내리라.”라고 전교하셨다
양희는 이조판서 이후백 및 예조판서 노진과 함께 천령삼걸로 일컬어졌다.
그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01년 구천서원에 제향되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