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박명부 : 1571~1639
- 작성일
- 2016-07-15 14:19:44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657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며 수우당 박덕형의 손자로서 본관은 밀양으로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8세에 글을 지었을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16세에 정온 선생의 부친인 정유명에게 학문을 배웠고 19세때 증광병과에 급제하였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 부정자의 벼슬을 시작으로 이듬해 승문원 저작을 제수받았으며, 가을에 한강 정구 를 뵙고 스승의 예를 올렸다.
임진왜란시 고향인 안의에서 의병을 모으고 진주로 가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논의했으며, 곽재우 장군의 진영에 들어가 전투에 참여하면서 의병 모집하는 일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헌부 지평을 거쳐 진주판관, 합천군수 등의 벼슬을 역임하기도 했다. 죽산부사 시절에 공부자묘(孔夫子廟)를 중건하여 학문을 일으켰으며 흉년에는 곤궁한 백성의 구원에 주력하였다.
광해군 때 조정의 어지러운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고자 여러번 상소를 올렸으며, 어릴 때 같이 수학한 동계 정온이 영창대군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갈 때는 이를 변호하기도 하는등 나라의 평안에 노력하였으나 조정이 더욱 어지러워져 향리로 내려왔다
인조가 등극하자 다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때 지족당은 조정에 있으면서 긴급하지 않은 공물은 없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상소를 올리는 것을 비롯해 둔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54세때 죽산도호부사, 56세 때 제주목사, 59세 때 형조참의 등의 내외직을 두루 거쳐, 61세때는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이라서 부임하지 않았다.
곧 이어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어 여러 시정책을 건의하는 등 소임을다했으며, 66세 때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지족당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지족당(知足堂)이라는 편액을 걸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67세때인 1637년 9월 마침내 농월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서 7월에 호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농월정을 지은 후에도 조정에선 예조참판 등의 벼슬로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후 68세 때 조정에서는 지족당의 출사를 강력하게 요구해 왔으나 사양을 거듭하다 어쩔 수 없이 강릉도호부사에 부임해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639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으며 1651년 조정에선 그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을 하였고 화천사에 배향되었다
농월정은 400여년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정자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한 선비가 자연에 자신의 몸을 의탁한 채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정자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농월정 앞 바위에 '지족당 장구지소' 라는 글을 새겨 놓았는데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를 짚고 거닐던 곳' 이란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자는 여러 번 중수를 거친 것으로 옛스런 멋은 없지만, 달을 희롱할만한 절경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8세에 글을 지었을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16세에 정온 선생의 부친인 정유명에게 학문을 배웠고 19세때 증광병과에 급제하였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 부정자의 벼슬을 시작으로 이듬해 승문원 저작을 제수받았으며, 가을에 한강 정구 를 뵙고 스승의 예를 올렸다.
임진왜란시 고향인 안의에서 의병을 모으고 진주로 가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논의했으며, 곽재우 장군의 진영에 들어가 전투에 참여하면서 의병 모집하는 일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헌부 지평을 거쳐 진주판관, 합천군수 등의 벼슬을 역임하기도 했다. 죽산부사 시절에 공부자묘(孔夫子廟)를 중건하여 학문을 일으켰으며 흉년에는 곤궁한 백성의 구원에 주력하였다.
광해군 때 조정의 어지러운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고자 여러번 상소를 올렸으며, 어릴 때 같이 수학한 동계 정온이 영창대군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갈 때는 이를 변호하기도 하는등 나라의 평안에 노력하였으나 조정이 더욱 어지러워져 향리로 내려왔다
인조가 등극하자 다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때 지족당은 조정에 있으면서 긴급하지 않은 공물은 없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상소를 올리는 것을 비롯해 둔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54세때 죽산도호부사, 56세 때 제주목사, 59세 때 형조참의 등의 내외직을 두루 거쳐, 61세때는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이라서 부임하지 않았다.
곧 이어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어 여러 시정책을 건의하는 등 소임을다했으며, 66세 때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지족당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지족당(知足堂)이라는 편액을 걸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67세때인 1637년 9월 마침내 농월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서 7월에 호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농월정을 지은 후에도 조정에선 예조참판 등의 벼슬로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후 68세 때 조정에서는 지족당의 출사를 강력하게 요구해 왔으나 사양을 거듭하다 어쩔 수 없이 강릉도호부사에 부임해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639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으며 1651년 조정에선 그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을 하였고 화천사에 배향되었다
농월정은 400여년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정자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한 선비가 자연에 자신의 몸을 의탁한 채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정자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농월정 앞 바위에 '지족당 장구지소' 라는 글을 새겨 놓았는데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를 짚고 거닐던 곳' 이란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자는 여러 번 중수를 거친 것으로 옛스런 멋은 없지만, 달을 희롱할만한 절경임에는 틀림이 없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