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숙동 (盧叔仝) : 1403~1463
- 작성일
- 2016-07-15 13:45:19
-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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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때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기록된 선생의 자는 화중(和仲)이고호는 송재(松齋)로서 본관은 풍천이다.
1427년(세종 9) 친시문과 을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분관되었으며 박사·교리(校理)·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자치통감훈의』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집현전의 선입, 수찬을 거쳐 왕에게 교서를 지어 올리는 지제교를 지내면서 역대의 사적에서 정치인들의 사표가 될만한 사실을 뽑아 적은 책인 『치평요람』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치평요람은 중국의 주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등 국가의 흥망성쇠와 군사.교육.외환등 윤리와 도덕에 바탕을 둔 사실들을 뽑아서 만든책으로서 후대에 귀감이 될만 한 책이다.
1436년 문과중시 을과로 급제하고 직강으로 승진하였다.
그뒤 전라도 도사와 집현전교리·응교를 역임, 항상 춘추관직을 겸임하고 경연에 참여하였다.
필선·보덕·사인을 거쳐, 1448년 지사간원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언사로 지통례첨사에 체직되었다.
1450년(문종 원년) 세자시강원 좌필선·예문관 직제학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하고, 이듬해 당상관으로 승진하면서 호분위상장군 겸 지병조사춘추관편수관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같은해 고려사의 보강 편집에 있어 기(紀)·지(志)·연표 집필에 참여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에 승진하면서 보문각제학과 동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예문관제학 겸 동지경연사에 이어 대사헌이 되면서 세자좌부빈객을 겸임하였고,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 형조참판에 체직되고, 이듬해 덕녕부윤·도진무를 거쳐 가정대부에 오르면서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예문관제학 겸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8년 호조참판에 이어 판진주목사·경상도관찰사·한성부윤·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62년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어명을 받아 민정을 살피게 되어 3도에 출장하였으나 대민관계에 이어 그의 청렴한 성품이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므로 선생의 고결한 인품이 소문이 나 훗날 청백리로 뽑혔고 상호군으로 보하여졌으며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701년 숙종 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제향되었다.
1427년(세종 9) 친시문과 을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분관되었으며 박사·교리(校理)·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자치통감훈의』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집현전의 선입, 수찬을 거쳐 왕에게 교서를 지어 올리는 지제교를 지내면서 역대의 사적에서 정치인들의 사표가 될만한 사실을 뽑아 적은 책인 『치평요람』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치평요람은 중국의 주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등 국가의 흥망성쇠와 군사.교육.외환등 윤리와 도덕에 바탕을 둔 사실들을 뽑아서 만든책으로서 후대에 귀감이 될만 한 책이다.
1436년 문과중시 을과로 급제하고 직강으로 승진하였다.
그뒤 전라도 도사와 집현전교리·응교를 역임, 항상 춘추관직을 겸임하고 경연에 참여하였다.
필선·보덕·사인을 거쳐, 1448년 지사간원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언사로 지통례첨사에 체직되었다.
1450년(문종 원년) 세자시강원 좌필선·예문관 직제학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하고, 이듬해 당상관으로 승진하면서 호분위상장군 겸 지병조사춘추관편수관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같은해 고려사의 보강 편집에 있어 기(紀)·지(志)·연표 집필에 참여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에 승진하면서 보문각제학과 동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예문관제학 겸 동지경연사에 이어 대사헌이 되면서 세자좌부빈객을 겸임하였고,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 형조참판에 체직되고, 이듬해 덕녕부윤·도진무를 거쳐 가정대부에 오르면서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예문관제학 겸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8년 호조참판에 이어 판진주목사·경상도관찰사·한성부윤·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62년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어명을 받아 민정을 살피게 되어 3도에 출장하였으나 대민관계에 이어 그의 청렴한 성품이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므로 선생의 고결한 인품이 소문이 나 훗날 청백리로 뽑혔고 상호군으로 보하여졌으며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701년 숙종 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제향되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