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 진 : 1518~1578
- 작성일
- 2016-07-15 13:44:17
-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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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청백리인 선생은 현릉 참봉을 지낸 노우명의 둘째 아들이며 세종때의 청백리 노숙동의 증손으로 자는 자응(子應), 호는 옥계(玉溪)이며 본관은 풍천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하였으며 숙성함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며 옆에 사람이 글을 읽기만 하여도 이를 듣고 곧 외우며 글 뜻을 이해할 정도였다.
이에 아버지가 기특하게 여겨 남달리 사랑하고 중용과 주역의 잠명발(훈계하는 뜻을 적은 글)을 손수 써서 가르치니 한 번 읽고 곧 뜻풀이까지 하였다.
1573년(중종 32년) 20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학사로 당대에 이름난 김인후, 기대승, 노수신, 이후백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공은 1546년(명조 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김안국의 천거로 승문원 정자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이후 박사.전적 예조의 낭관을 거쳐 지례현감이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한때 임금이 청백리들을 위한 궁중 연회를 열었을 때 이에 공이 제일 먼저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지평. 형조참의 등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며 1567년 이조참의에서 충청도 관찰사, 전주부윤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는데 홀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모두 사퇴하고 곤양군수로 나가는 등, 관직에 있으면서도 문득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여 임금께 소를 올려 물러갈 뜻을 간청하면 임금은 벼슬을 거두지 않고 공의 고향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어머니께 불편이 없도록 값진 옷과 호피 등 생활 필수품을 내리도록 하명하였다.
고을의 원살이로는 지례현감, 담양부사, 전주부윤, 진주목사, 충청감사, 경상감사를 거치는 동안 교활한 아전들을 억누르고 선량한 백성들의 피해를 막고 공사를 엄격히 하여 지난날 전임 사또와 관원들의 비행과 부정을 캐내어 바르게 다스리니, 자연히 선정이 베풀어져 가는 곳마다 송덕비와 유애비를 세워 지난날 공의 선정과 공덕을 영원히 흠모하였다.
한때 진풍연(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벌어진 큰 잔치)을 베풀었을 때 공은 선조 임금의 만수 무강을 비는 시를 지어 올렸는데 이 시조는 한국고시조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현대인들도 이 시조를 즐겨 부르고 있다.
『만수산 만수동에 만수천이 있더이다.
이 물로 술을 빚어 만수주라 하더이다.
이 잔을 잡으오시면 만수무강 하시리라.』
하고 잔을 올리니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옆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함께 불렀다 한다.
공이 내직에 있으면서 한번은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에 선조 임금은 너무나도 서운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오면 가려 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 날이 전혀 없네.
오늘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퍼하노라. 』
하는 시조를 지어 은쟁반에 글씨로 써서 중사로 하여금 막 한강을 건너려던 노진에게 전하라 하였다.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다시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내직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나가지 못하였다.
이에 선조대왕은 특별히 모범이 되므로 기로사에 입사시키고
'이조판서 노진은 원래 덕망이 있고 사림들의 정신을 높인 바가 크다. 너무나도 청빈하여 탕제 하나가 변변치 못하니 나라에서 의당 문병하는 예를 갖추라' 면서 내의와 탕약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몇 달후 61세를 일기로 한양의 셋방살이 집에서 세상을 뜨자 율곡 이이가 말하기를,
'이제 이조판서를 할 사람이 없다. 참 재상 감이 갔다.' 라고 하였으며 소문이 장안에 돌자 애통과 애석함을 금하지 못하여 2일간 조회를 중지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으며 선조는 제문을 직접 지어서 내렸고 부의금도 보통 때보다 더하였으며 제관을 보내 상을 치르게 하였다.
공의 집안은 본시 가난하여 돌아가는 날에 집에 있는 것이 없고 하사금과 부의금으로 겨우 초상을 치르니 장안의 사대부들과 심부름꾼까지도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고향으로 반상할 때에는 함양 고을 사람들이 늙고 젊은이 없이 운상을 맞이하여 조문과 부의가 밀렸고, 장사를 지낼 때 곡하는 소리가 고을에 울려 퍼졌다.
저서로는 옥계집 7권이 있는데 국립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579년에 남원시 고룡에 고룡사당을 지어 선생을 모시도록 하고 1600년에 고룡사당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종가댁으로 옮겨 짓고 그 자리에 창주서원과 고향 함양에 당주서원(서원 철폐시 훼철되고 현재는 사당비만 남아 있음)이라는 사액서원을 내려 선생을 제향하도록 하고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조때부터 전국 각지의 선비들 1200여명이 연서,문묘에 종사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여 고종황제 시대까지 끌었으나 붕당 싸움으로 결국 결실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로 정문(함양군 지곡면 덕암마을 앞 도로변)이 세워졌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하였으며 숙성함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며 옆에 사람이 글을 읽기만 하여도 이를 듣고 곧 외우며 글 뜻을 이해할 정도였다.
이에 아버지가 기특하게 여겨 남달리 사랑하고 중용과 주역의 잠명발(훈계하는 뜻을 적은 글)을 손수 써서 가르치니 한 번 읽고 곧 뜻풀이까지 하였다.
1573년(중종 32년) 20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학사로 당대에 이름난 김인후, 기대승, 노수신, 이후백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공은 1546년(명조 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김안국의 천거로 승문원 정자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 이후 박사.전적 예조의 낭관을 거쳐 지례현감이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한때 임금이 청백리들을 위한 궁중 연회를 열었을 때 이에 공이 제일 먼저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지평. 형조참의 등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며 1567년 이조참의에서 충청도 관찰사, 전주부윤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는데 홀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모두 사퇴하고 곤양군수로 나가는 등, 관직에 있으면서도 문득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여 임금께 소를 올려 물러갈 뜻을 간청하면 임금은 벼슬을 거두지 않고 공의 고향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어머니께 불편이 없도록 값진 옷과 호피 등 생활 필수품을 내리도록 하명하였다.
고을의 원살이로는 지례현감, 담양부사, 전주부윤, 진주목사, 충청감사, 경상감사를 거치는 동안 교활한 아전들을 억누르고 선량한 백성들의 피해를 막고 공사를 엄격히 하여 지난날 전임 사또와 관원들의 비행과 부정을 캐내어 바르게 다스리니, 자연히 선정이 베풀어져 가는 곳마다 송덕비와 유애비를 세워 지난날 공의 선정과 공덕을 영원히 흠모하였다.
한때 진풍연(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벌어진 큰 잔치)을 베풀었을 때 공은 선조 임금의 만수 무강을 비는 시를 지어 올렸는데 이 시조는 한국고시조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현대인들도 이 시조를 즐겨 부르고 있다.
『만수산 만수동에 만수천이 있더이다.
이 물로 술을 빚어 만수주라 하더이다.
이 잔을 잡으오시면 만수무강 하시리라.』
하고 잔을 올리니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옆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함께 불렀다 한다.
공이 내직에 있으면서 한번은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에 선조 임금은 너무나도 서운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오면 가려 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 날이 전혀 없네.
오늘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퍼하노라. 』
하는 시조를 지어 은쟁반에 글씨로 써서 중사로 하여금 막 한강을 건너려던 노진에게 전하라 하였다.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다시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내직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나가지 못하였다.
이에 선조대왕은 특별히 모범이 되므로 기로사에 입사시키고
'이조판서 노진은 원래 덕망이 있고 사림들의 정신을 높인 바가 크다. 너무나도 청빈하여 탕제 하나가 변변치 못하니 나라에서 의당 문병하는 예를 갖추라' 면서 내의와 탕약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몇 달후 61세를 일기로 한양의 셋방살이 집에서 세상을 뜨자 율곡 이이가 말하기를,
'이제 이조판서를 할 사람이 없다. 참 재상 감이 갔다.' 라고 하였으며 소문이 장안에 돌자 애통과 애석함을 금하지 못하여 2일간 조회를 중지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으며 선조는 제문을 직접 지어서 내렸고 부의금도 보통 때보다 더하였으며 제관을 보내 상을 치르게 하였다.
공의 집안은 본시 가난하여 돌아가는 날에 집에 있는 것이 없고 하사금과 부의금으로 겨우 초상을 치르니 장안의 사대부들과 심부름꾼까지도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고향으로 반상할 때에는 함양 고을 사람들이 늙고 젊은이 없이 운상을 맞이하여 조문과 부의가 밀렸고, 장사를 지낼 때 곡하는 소리가 고을에 울려 퍼졌다.
저서로는 옥계집 7권이 있는데 국립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579년에 남원시 고룡에 고룡사당을 지어 선생을 모시도록 하고 1600년에 고룡사당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종가댁으로 옮겨 짓고 그 자리에 창주서원과 고향 함양에 당주서원(서원 철폐시 훼철되고 현재는 사당비만 남아 있음)이라는 사액서원을 내려 선생을 제향하도록 하고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조때부터 전국 각지의 선비들 1200여명이 연서,문묘에 종사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여 고종황제 시대까지 끌었으나 붕당 싸움으로 결국 결실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로 정문(함양군 지곡면 덕암마을 앞 도로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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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