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곽 준 (郭 준) : 1551~1597
- 작성일
- 2016-07-15 13: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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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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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현풍으로 달성군 현풍면 솔례리에서 태어났다.
정유재란시 황석산성에서 왜병들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공은 무예가 출중하고 현명하여 관찰사 김성일이 자여도 찰방으로 임명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면과 함께 출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바 있으며 나라가 안정이 되자 공의 무공을 인정받아 1594년 안음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현감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고 청렴하기 이를데 없었다..공은 말하기를 『선조 대대로 청백함으로써 나라에 보답했거늘, 내 지금 한 고을을 맡은 바가 되어 조상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다행하지 않으랴』 하였다. 이처럼 모든 이가 고개를 숙일 정도로 청렴결백한 공의 인품이었다. 이 때 조정의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으로부터 황석산성을 축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이유는 비록 왜란이 종결되었다고는 하나 왜적이 재침하게되면 서부 경남쪽으로 진군하여 호남지방으로 빠져 나갈 통로를 확보하리라는 예측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양을 지나야 하며 이 곳에서 적의 진로를 저지하게 되면 시간적으로 연장시킬수 있다는 계책에서였다.
명령을 받은 곽준은 직접 지휘하에 산성을 축조하였고 내부에는 병기를 두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함양군수 조종도와 함께 함양, 안의, 거창 등 세읍의 군민이 이 성에 피신하여 왜장 가등청정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의 형편은 임진왜란의 혼란으로 정상적인 국가의 안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유재란을 맞아 왜적과 전투를 한다는 힘겨운 일이었다.
이 때 김해 부사 백사림이 군사를 이끌고 이 곳 황석산성으로 지원해 옴으로서 아군의 사기는 높았다.
황석산성은 동북쪽의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한 곳이기 때문에 백사림이 동북쪽을 맡고 공은 평평한 남서쪽을 맡고 있었다.
왜적은 동북쪽을 쳐 들어 올 것이다 하는 예측을 뒤엎고 평평한 남서쪽으로 쳐 들어오므로, 공이 활 하나에 화살 3개를 함께 쏘니 모두 적중되어 세사람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적군은 신통한 화살의 명궁이 있다하여 공격을 중지했다가 얼마 후 일제히 공격하니 전세는 아군이 불리하게 되어 갔다. 이 때 겁에 질린 백사림이 북문을 열어 놓고 그의 가족을 먼저 피신 시킨후 도망을 치자 왜군들은 일제히 성문으로 몰려 왔다. 성은 하룻만에 함락되고 말았으니 1597년 8월 18일 달 밝은 밤이었다. 밀고 밀리는 전투는 밤새껏 계속되었고 결국은 중과부적의 열세로 500여명의 아까운 목숨을 잃은채 종말을 고했다. 성안은 수라장이 되고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공도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본 곽이상, 곽이후 두아들이 달려와서 아버지를 보호 간호하려하자 곽공은,
『나는 직책이 있어서 이 성을 사수해야 하나 너희들은 몸을 피하라』라고 하자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는데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서 죽는 것이 불가한 일입니까?』 하면서 적과 육박전으로 응수, 사력을 다했지만 그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에 공은 두 아들의 최후를 보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가 1597년 음력 8월 18일로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이 때 공의 사위되는 유문호가 싸움터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은 곽공의 딸은 몸종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내가 죽지 안은 것은 나의 가장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가장이 전사했으니 내가 살아서 무었하겠느냐』고 하며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공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남아 대장부의 대의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굳이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와 그의 아들이며 며느리 또한 남편의 뒤를 따랐으며 딸은 아버지와 함께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남편의 영혼을 달래는 일이라 하여 자진하였으니 일가족 모두가 비참하지만 거룩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곽준의 충과, 두 아들의 효와, 며느리 거창 신씨와 딸의 열로 이어지는 한 가족의 숭고한 죽음은 3강 5륜에서 3강을 한 가문에서 이루어 놓았다.
훗 날 선조대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1집 3강이라 하시고 정려를 세워 표 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안의면 당본리에 황암사라는 사당을 짓고 봄 가을 두차례 제를 올려왔으나 한말 군국 일본의 강압으로 없어졌다.
함양군에서는 2001년 황암사 사당을 서하면 황산리의 황석산 밑에 재건하고 매년 음력 8월 18일 제를 올리고 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안의의 황암사당, 현풍의 예연서원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공이다.
정유재란시 황석산성에서 왜병들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공은 무예가 출중하고 현명하여 관찰사 김성일이 자여도 찰방으로 임명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면과 함께 출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바 있으며 나라가 안정이 되자 공의 무공을 인정받아 1594년 안음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현감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고 청렴하기 이를데 없었다..공은 말하기를 『선조 대대로 청백함으로써 나라에 보답했거늘, 내 지금 한 고을을 맡은 바가 되어 조상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다행하지 않으랴』 하였다. 이처럼 모든 이가 고개를 숙일 정도로 청렴결백한 공의 인품이었다. 이 때 조정의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으로부터 황석산성을 축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이유는 비록 왜란이 종결되었다고는 하나 왜적이 재침하게되면 서부 경남쪽으로 진군하여 호남지방으로 빠져 나갈 통로를 확보하리라는 예측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양을 지나야 하며 이 곳에서 적의 진로를 저지하게 되면 시간적으로 연장시킬수 있다는 계책에서였다.
명령을 받은 곽준은 직접 지휘하에 산성을 축조하였고 내부에는 병기를 두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함양군수 조종도와 함께 함양, 안의, 거창 등 세읍의 군민이 이 성에 피신하여 왜장 가등청정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의 형편은 임진왜란의 혼란으로 정상적인 국가의 안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유재란을 맞아 왜적과 전투를 한다는 힘겨운 일이었다.
이 때 김해 부사 백사림이 군사를 이끌고 이 곳 황석산성으로 지원해 옴으로서 아군의 사기는 높았다.
황석산성은 동북쪽의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한 곳이기 때문에 백사림이 동북쪽을 맡고 공은 평평한 남서쪽을 맡고 있었다.
왜적은 동북쪽을 쳐 들어 올 것이다 하는 예측을 뒤엎고 평평한 남서쪽으로 쳐 들어오므로, 공이 활 하나에 화살 3개를 함께 쏘니 모두 적중되어 세사람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적군은 신통한 화살의 명궁이 있다하여 공격을 중지했다가 얼마 후 일제히 공격하니 전세는 아군이 불리하게 되어 갔다. 이 때 겁에 질린 백사림이 북문을 열어 놓고 그의 가족을 먼저 피신 시킨후 도망을 치자 왜군들은 일제히 성문으로 몰려 왔다. 성은 하룻만에 함락되고 말았으니 1597년 8월 18일 달 밝은 밤이었다. 밀고 밀리는 전투는 밤새껏 계속되었고 결국은 중과부적의 열세로 500여명의 아까운 목숨을 잃은채 종말을 고했다. 성안은 수라장이 되고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공도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본 곽이상, 곽이후 두아들이 달려와서 아버지를 보호 간호하려하자 곽공은,
『나는 직책이 있어서 이 성을 사수해야 하나 너희들은 몸을 피하라』라고 하자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는데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서 죽는 것이 불가한 일입니까?』 하면서 적과 육박전으로 응수, 사력을 다했지만 그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에 공은 두 아들의 최후를 보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가 1597년 음력 8월 18일로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이 때 공의 사위되는 유문호가 싸움터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은 곽공의 딸은 몸종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내가 죽지 안은 것은 나의 가장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가장이 전사했으니 내가 살아서 무었하겠느냐』고 하며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공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남아 대장부의 대의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굳이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와 그의 아들이며 며느리 또한 남편의 뒤를 따랐으며 딸은 아버지와 함께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남편의 영혼을 달래는 일이라 하여 자진하였으니 일가족 모두가 비참하지만 거룩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곽준의 충과, 두 아들의 효와, 며느리 거창 신씨와 딸의 열로 이어지는 한 가족의 숭고한 죽음은 3강 5륜에서 3강을 한 가문에서 이루어 놓았다.
훗 날 선조대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1집 3강이라 하시고 정려를 세워 표 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안의면 당본리에 황암사라는 사당을 짓고 봄 가을 두차례 제를 올려왔으나 한말 군국 일본의 강압으로 없어졌다.
함양군에서는 2001년 황암사 사당을 서하면 황산리의 황석산 밑에 재건하고 매년 음력 8월 18일 제를 올리고 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안의의 황암사당, 현풍의 예연서원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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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