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강 익 (姜翼) : 1523~1567
- 작성일
- 2016-07-15 13:35:41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571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서 호는 개암(介庵), 자는 중보(仲輔)이며 강한 의 손자로서 함양군 수동면에서 태어났다.
유학의 대학자로서 지리산에 은거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한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때에 진사시에 합격 하였으며 동국18현이며 조선 5현이신 정여창 선생의 심오한 사상을 전수 받을만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566년(명종21) 홍문관 전한의 벼슬을 지내면서 정여창 선생의 누명을 벗기기 위하여 유생 33명을 설득하여 상소를 올린바 있으며 후학들의 양성을 서둘러 많은 선비들을 배출 시켰다.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하여 독서로 여생을 보내면서 향토의 유생들과 당시의 함양군수를 설득하여 정여창 선생을 기리는 남계서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착수하였으나 재정 부족으로 공기가 연장되어 3명의 군수를 거치면서 어려움을 극복, 10년만에 완공하여 선비 고장의 긍지를 높이고 학풍을 잇게하여 군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1689년(숙종15년)에 남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개암집이 있다.
유학의 대학자로서 지리산에 은거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한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때에 진사시에 합격 하였으며 동국18현이며 조선 5현이신 정여창 선생의 심오한 사상을 전수 받을만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566년(명종21) 홍문관 전한의 벼슬을 지내면서 정여창 선생의 누명을 벗기기 위하여 유생 33명을 설득하여 상소를 올린바 있으며 후학들의 양성을 서둘러 많은 선비들을 배출 시켰다.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하여 독서로 여생을 보내면서 향토의 유생들과 당시의 함양군수를 설득하여 정여창 선생을 기리는 남계서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착수하였으나 재정 부족으로 공기가 연장되어 3명의 군수를 거치면서 어려움을 극복, 10년만에 완공하여 선비 고장의 긍지를 높이고 학풍을 잇게하여 군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1689년(숙종15년)에 남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개암집이 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