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후백 (李後白) : 1520~1578
- 작성일
- 2016-07-15 14:39:19
-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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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이며 본관은 연안이고 1520년(중종15) 이국형의 아들로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9살 때 부모를 여의고 백부의 손에서 자랐으며 16세때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후 외가인 전남 강진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27세때인 명종 초기 진사에 합격한 후 1555년(명종10)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정자직을 맡아보다가 승정원 주서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고 이후 시강원설서, 사서, 정언, 사간, 병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 응교가 되어 사가독서의 영전을 입었다.
선조대왕이 즉위하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병조참지를 거치는등 여러 벼슬을 거쳐 제학에 이르렀고 1558년에는 승문원 박사에 보직되었다가 1563년 귀향하여 독서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1569년(선조2) 성절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대사간, 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고,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냈고 양관 대제학을 지내기도 하였다.
1574년 형조판서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민심을 바로잡고 국가 기강을 세우는데 힘썼다.
선생의 청렴한 인품이 그의 문장과 연결된 것은 천성이 거짓없는 양심으로 성장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무시할수 없으며 사욕을 탐내지 않아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다.
1577년(선조10)에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복상문제로 의견이 여러갈래로 나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이 때 선생은 3년상을 주장하여 선조의 재가를 얻어 실행케 함으로써 문신으로서의 높은 인격을 조정에서도 인정하게 되었으며 국상을 당하여서는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면서 임회, 김순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백광훈, 최경창등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1578년(선조11) 6월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고향인 함양에 성묘를 하겠다고 선조로부터 휴가를 받아 와 있었는데 그해 10월에 오랜 동향 친구인 옥계 노진 선생이 죽자 영구 앞에서 너무나 애통해하며 슬퍼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하룻밤을 앓다가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있고 문집으로는 청련집을 남겼다.
1573년(선조6)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명나라에서 왕조의 계보에 대한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이른바 종계변무를 했기 때문에 그 공이 인정되어 1597년(선조30)에 광국공신 2등으로 기록되었고 연양군으로 추봉되었으며,옥계 노진, 구졸암 양희 선생과 함께천령 3걸로 일컬어진다
공의 시호는 문청공이고 함흥의 문희서원과 당진의 월암서원, 전남 강진의 박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선생이 이조판서에 있을시 있었던 일화이다
이조판서 이후백은 하찮은 벼슬이라도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본 후에 조심해서 썼으며, 아무리 권력 있는 사람의 청탁이라도 들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손을 거쳐 임명된 벼슬아치가 잘못을 저지른다든지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다고 여겨지면 밤을 꼬박 새우면서, 자기가 나라의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도 이후백에게 감히 청을 넣어 벼슬을 하려고 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좋은 자리를 탐하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이후백의 친척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넌지시 부탁을 했다, 그의 성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친척이니까 봐주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가만히 듣고 난 이후백은 작은 책을 한 권 꺼내어 펼치면서
'자네를 추천하려고 내 명부에 올려 놓았더니 지금보니 안되겠네.' 하고 추천자 명단에서 지워버렸다고 한다.
9살 때 부모를 여의고 백부의 손에서 자랐으며 16세때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후 외가인 전남 강진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27세때인 명종 초기 진사에 합격한 후 1555년(명종10)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정자직을 맡아보다가 승정원 주서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고 이후 시강원설서, 사서, 정언, 사간, 병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 응교가 되어 사가독서의 영전을 입었다.
선조대왕이 즉위하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병조참지를 거치는등 여러 벼슬을 거쳐 제학에 이르렀고 1558년에는 승문원 박사에 보직되었다가 1563년 귀향하여 독서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1569년(선조2) 성절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대사간, 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고,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냈고 양관 대제학을 지내기도 하였다.
1574년 형조판서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민심을 바로잡고 국가 기강을 세우는데 힘썼다.
선생의 청렴한 인품이 그의 문장과 연결된 것은 천성이 거짓없는 양심으로 성장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무시할수 없으며 사욕을 탐내지 않아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다.
1577년(선조10)에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복상문제로 의견이 여러갈래로 나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이 때 선생은 3년상을 주장하여 선조의 재가를 얻어 실행케 함으로써 문신으로서의 높은 인격을 조정에서도 인정하게 되었으며 국상을 당하여서는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면서 임회, 김순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백광훈, 최경창등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1578년(선조11) 6월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고향인 함양에 성묘를 하겠다고 선조로부터 휴가를 받아 와 있었는데 그해 10월에 오랜 동향 친구인 옥계 노진 선생이 죽자 영구 앞에서 너무나 애통해하며 슬퍼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하룻밤을 앓다가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있고 문집으로는 청련집을 남겼다.
1573년(선조6)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명나라에서 왕조의 계보에 대한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이른바 종계변무를 했기 때문에 그 공이 인정되어 1597년(선조30)에 광국공신 2등으로 기록되었고 연양군으로 추봉되었으며,옥계 노진, 구졸암 양희 선생과 함께천령 3걸로 일컬어진다
공의 시호는 문청공이고 함흥의 문희서원과 당진의 월암서원, 전남 강진의 박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선생이 이조판서에 있을시 있었던 일화이다
이조판서 이후백은 하찮은 벼슬이라도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본 후에 조심해서 썼으며, 아무리 권력 있는 사람의 청탁이라도 들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손을 거쳐 임명된 벼슬아치가 잘못을 저지른다든지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다고 여겨지면 밤을 꼬박 새우면서, 자기가 나라의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도 이후백에게 감히 청을 넣어 벼슬을 하려고 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좋은 자리를 탐하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이후백의 친척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넌지시 부탁을 했다, 그의 성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친척이니까 봐주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가만히 듣고 난 이후백은 작은 책을 한 권 꺼내어 펼치면서
'자네를 추천하려고 내 명부에 올려 놓았더니 지금보니 안되겠네.' 하고 추천자 명단에서 지워버렸다고 한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