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조승숙 (趙承肅) : 1357~1418
- 작성일
- 2016-07-15 13:28:11
-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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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2
고려말의 학자요 충신으로서 조선 개국시 고려에 대한 절의로 두문동으로 들어간 72현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덕곡(德谷)이며 자는 경부(敬夫)로서 함양군 지곡면 사람이다. 선생은 어릴때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고려 우왕때 약관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저작랑에 발탁되었다.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그 민첩함과 강변이 뛰어나 황제가 특별히 자금어대를 하사하여 그 명성이 중국에 널리 퍼졌다.
선생은 정몽주를 스승으로 섬기어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강론하는데 힘썼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앞장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간신들의 시기를 많이 받았으며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부여 감무가 되었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의 태조로서 나라를 세우자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나오지 않는 두문동 72인이 되었으며 향리로 돌아와 교수정을 짓고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니 이로부터 함양을 비롯한 인근 지방까지 선비바람이 일어나 어진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 태종때 공의 충직함에 왕이 침향궤를 하사하였다.
성종임금은 공이 61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그 충절을 기리어 유호인으로 하여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제문에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이라고 하였으며 왕이 교수정에 사제문을 내리니 후세 사람들이 그의 충의를 흠모하고 있다.
1701년(숙종왕)에 도곡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덕곡집이 전한다.
호는 덕곡(德谷)이며 자는 경부(敬夫)로서 함양군 지곡면 사람이다. 선생은 어릴때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고려 우왕때 약관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저작랑에 발탁되었다.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그 민첩함과 강변이 뛰어나 황제가 특별히 자금어대를 하사하여 그 명성이 중국에 널리 퍼졌다.
선생은 정몽주를 스승으로 섬기어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강론하는데 힘썼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앞장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간신들의 시기를 많이 받았으며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부여 감무가 되었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의 태조로서 나라를 세우자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나오지 않는 두문동 72인이 되었으며 향리로 돌아와 교수정을 짓고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니 이로부터 함양을 비롯한 인근 지방까지 선비바람이 일어나 어진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 태종때 공의 충직함에 왕이 침향궤를 하사하였다.
성종임금은 공이 61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그 충절을 기리어 유호인으로 하여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제문에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이라고 하였으며 왕이 교수정에 사제문을 내리니 후세 사람들이 그의 충의를 흠모하고 있다.
1701년(숙종왕)에 도곡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덕곡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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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