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박충좌 (朴忠佐) : 미상
- 작성일
- 2016-07-15 13:26:12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617
선생의 호는 치암(恥菴)이고 자는 자화(子華)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고려때의 상서 박선(朴善)의 후손으로 총랑을 지낸 박장(朴莊)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제공(文齊公)이다.
충렬왕13년(1287년)에 출생하였으며 충숙왕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안렴사로 나갔을 때 간신 박신이 왕에게 아첨만 하면서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는 비행을 자행하자 이를 저지할려고 하다가 무고를 당하여 외딴섬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무고가 확인되어 감찰사 지평, 예문관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간신들과는 정사를 볼수 없다면서 병을 이유로 취임을 거부했다.
후일 내서사인, 밀직제학, 개성부윤을 거쳐 충혜왕때에는 지공거(요즈음의 시험 고시관)에 이르렀고 충목왕때 찬성사가 되었으며 왕에게 경연총에서 왕의 몸가짐과 왕도정치를 다룬 정관정요를 강론하였다.
선생은 덕망과 학식이 높아 종일품에 겸하던 삼사의 최고지위인 판삼사사에 이르렀으며 순성보덕협찬공신이 되어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렬왕때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의 문인인 백이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시 세자이던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간 연구를 하고 돌아온 후 스승의 뜻을 받들어 이재현과 함께 성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선생의 학문은 고려말의 이색, 정몽주, 조선의 권근, 정도전을 거쳐 학문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정여창 선생의 도학사상인 실천적 성리학에 이르게 된다.
학자로서 재상의 벼슬까지 올랐으나 불의와 부정을 몰라 청빈함이 평상시나 다름이 없었으며 굳건히 문인의 길을 간 선생은 노후가 평탄치 않았으나 항상 주역을 즐겨 읽다가 충정왕 1년(1349년)에 영면하였다.
예천군의 금곡서원과 남해군의 난곡사당등에 제향되고 있다.
고려때의 상서 박선(朴善)의 후손으로 총랑을 지낸 박장(朴莊)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제공(文齊公)이다.
충렬왕13년(1287년)에 출생하였으며 충숙왕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안렴사로 나갔을 때 간신 박신이 왕에게 아첨만 하면서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는 비행을 자행하자 이를 저지할려고 하다가 무고를 당하여 외딴섬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무고가 확인되어 감찰사 지평, 예문관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간신들과는 정사를 볼수 없다면서 병을 이유로 취임을 거부했다.
후일 내서사인, 밀직제학, 개성부윤을 거쳐 충혜왕때에는 지공거(요즈음의 시험 고시관)에 이르렀고 충목왕때 찬성사가 되었으며 왕에게 경연총에서 왕의 몸가짐과 왕도정치를 다룬 정관정요를 강론하였다.
선생은 덕망과 학식이 높아 종일품에 겸하던 삼사의 최고지위인 판삼사사에 이르렀으며 순성보덕협찬공신이 되어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렬왕때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의 문인인 백이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시 세자이던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간 연구를 하고 돌아온 후 스승의 뜻을 받들어 이재현과 함께 성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선생의 학문은 고려말의 이색, 정몽주, 조선의 권근, 정도전을 거쳐 학문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정여창 선생의 도학사상인 실천적 성리학에 이르게 된다.
학자로서 재상의 벼슬까지 올랐으나 불의와 부정을 몰라 청빈함이 평상시나 다름이 없었으며 굳건히 문인의 길을 간 선생은 노후가 평탄치 않았으나 항상 주역을 즐겨 읽다가 충정왕 1년(1349년)에 영면하였다.
예천군의 금곡서원과 남해군의 난곡사당등에 제향되고 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