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동 전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하였으며, 이를 본 고려시대의 이인로, 조선시대의 김종직과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 등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바 있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 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고,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 고원을 청학동이라고 짚어 보긴 했지만 확신을 갖진 못하였다.

현재 지리산에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현재의 청학동 말고도 여러 군데가 있다. 불일폭포 부근, 세석 고원,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상덕평 마을(선비샘 아래) 등이다.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그런 중에 섬진강 지류인 횡천강을 약 50리 정도 거슬러 올라간 해발 약 800m의 첩첩산중인 청암면 묵계리 학동 마을이 청학동으로 유명해진 것은 그 입지가 전설상 깊은 골짜기와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외부와 담 쌓고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사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매스컴을 타면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동읍에서 진주쪽으로 한참 가다가 횡천에서 묵계로 난 좁은 산골짜기를 따라가면 한참 만에 당도하는데, 포장길 반 비포장길 반으로 이어지는 청학동 가는 길에는 횡천강과 횡천강을 막아 만든 하동댐과 묵계댐, 그 댐으로 인해 만들어진 호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높고 낮은 산들이 곳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또한 협곡을 끼고 만나는 작은 산간 마을들은 아직도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소위 도인촌(道人村)이라고 불리는 이 청학동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이 창시한 유불선갱정유도 교(儒佛仙更定儒道敎)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곳으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으며, "유불선과 동, 서학을 합일하여 현대문화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하고 인의예지의 인간본성을 수양하여 인간윤리를 실천한다" 는 교리에 따라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유교적인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이들은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서당에서 훈장에게 가르침을 받고,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80년대 이후 청학동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외부 사람들의 드나듦이 잦아졌고, 어쩔 수 없이 이곳도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도인촌이라기 보다 관광촌이라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은둔지로서의 청학동 성격은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상투를 틀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을 깊은 지리산 속에서 불쑥 마주하게 되는 첫인상은 매우 강렬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 100년 쯤은 거꾸로 가 있는 듯하다.

비록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전부터 형성된 뿌리 깊은 마을도 아니고, 대대로 전승해 온 독특한 역사가 있어서도 아니지만, 근대화와 서구화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청학동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지키고자 하는 의식과 생활양식은 '전통적인 것에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 같다.


담당
문화관광과 관광기획담당 (☎ 055-960-4520)
최종수정일
2023.12.18 15: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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