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곡면

함양의 전설

팥죽배미와 원넘이재 [고리대금업자에게 빼앗겼던 논]

고리대금 업자에게 빼앗겼던 논이 있는 병곡면 원산리는 산으로 에워싸인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동쪽으로는 천왕봉 줄기가 뻗어내려 험한 재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백운산에서 갈라져 뻗어내린 험준한 산으로 싸여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산마을로서는 제법 큰 마을로 한창 번성했던 때는 100여호의 농가로 구성되어 있는 아늑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도시화 물결의 영향을 받아 여느 농촌 마을처럼 비어있는 집들이 많으며 주민들은 여러 지방에서 모여들어 각각 다른 성씨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오랜 옛날에 정변을 피해 산속에서 피난 생활을 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 와서 자리잡았던 경주 김씨네 자손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웃지 못할 전설이 하나 있다.
수백년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서 이 마을에 난데 없는 사람이 먼 곳에서부터 이사를 왔는데 성은 박씨라고 전해진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험상궂은 얼굴에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글은 조금 읽어서 무식은 면할 정도라고 하였다.
조상 때 벼슬아치를 했노라고 허풍을 치고 가지고 온 재물을 풀어서 논밭을 사들이고 장리나 곱리로 높은 이자를 받아 챙기는 악질적인 돈놀이꾼 노릇을 하였다.

읍내를 드나들며 그 시대의 고을 원님을 만났다느니 아전들과 술좌석을 가졌다느니 하면서 허세를 떨고 무례한 짓들을 일삼았다.
자기보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가 하면 자기보다 권세있는 사람이나 호족들에게는 갖은 아양과 친절로써 아부를 떨곤하였다.

비굴하면서도 교활한 인간이어서 여러 차례 주민들의 규탄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면피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그 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여 관의 기동성이 이 산중 마을에까지 거의 미치지 못하던 때였다.
관헌의 입김은 멀고 영향력이 적은 때라 이러한 사람들이 견디어 내는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던 터였다.

어느 해던가 날씨가 몹시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아 2년이나 계속 흉년이 들었고 또 연이어 큰 장마가 져서 산중의 논밭은 냉해로 흉작이 들어 마을 사람들의 식생활이 극도로 어렵게 되었다.

그해 어느 김씨는 자기 곡간을 헐고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며 관가를 찾아가 주민들의 생명을 부지할 양식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생명을 이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고 있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 구민 정책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이 즈음에 이 마을에도 여느 마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갖은 고난과 함께 박씨의 비행은 더욱 심하게 자행되고 있어서 주민들이 모두 사람 대접을 하지 않았다.

속담에 '사흘 굶어서 담 안넘을자 없다' 고 하듯이 답답한 자가 우물을 팔 수 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생기곤 하였다.

그 당시 이 마을에 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과 많은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품성이 어질고 근면하여 열심히 일해서 모은돈으로 논 몇마지기를 사서 경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연이은 흉년에 식량은 떨어지고 노부모와 자식들의 굶주림이 날로 극심하였다.

강씨는 참다 못해 식구들을 살리려고 박씨의 집을 방문하여 양곡을 빌려 줄 것을 청하였던 바 박씨가 말하기를

“금년 흉작으로 많은 사람이 양곡을 빌려 주기를 청해 왔으나 줄게 없구나. 그러나 그대는 우리와는 친한 사이니 내 아직 헐지 않은 창고를 헐어 식량을 줄테니 그대와 우리집 머슴을 데리고 같이 오게나.”

라고 하였다.

덕을 베풀어 큰 인심이나 쓰는 듯이 어깨를 올려 으쓱대며 큰 기침을 하며 껄껄대고 있었다.
굴욕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참을 수 없었으나 가족들이배고파 절규하는 모습이 떠올라 꾹참았다.
'내 도둑질 외에 무슨 짓을 못하리 !' 하고 마음 속으로 일어나는 수치심을 삼키면서

“고맙소 내 그 은혜 잊지 않겠소.”

하며 곡식 자루를 내어 밀었다.

그러나 곡식은 주지 않고 백지와 먹을 갈아주며 전답을 담보로 하는 수결을 하라는 것이다.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내 갚으면 그만이지' 하고 자기가 원하는 수답을 담보로 해주면서 곡식을 청했다.
그러나 이 강도같은 박씨는 곡식은 주지 않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한시가 고달프고 굶주림에 시달린 가족들을 생각하니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머슴을 데리고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더니 곡식은 주지 않고 난데없이 동이 하나를 내놓으며 하는 말이

“내 그대와 친분을 생각하여 곡식을 주는 것보다 쉽게 입에 넣을 수 있게 팥죽을 쑤어 드리니 어서 가져가 잡수시게.” 하였다.

평소 양처럼 순하고 개미처럼 착실한 강씨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동이를 엎어버리고 호통을 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참는 것이 약이라 하지 않았는가. 참자! 하고 황급히 죽동이를 메고 집에 가서 식솔들에게 나누어 주며

“아무개한테서 죽 한동이를 얻었노라.” 고 말하고 먹였다 한다.

그럭 저럭 이듬해 봄이 되었는데 이웃집 사람들이

“강씨네 논을 박씨네 머슴이 갈고 있던데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니

“주인님이 이 논은 팥죽 한동이와 바꾸었으니 금년부터 나더러 농사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놀란 강씨는 곧 박씨를 찾아가 항의를 해보았으나 그 악질적인 박씨가 돌려줄리 만무했다.

그렇게 논을 빼앗긴 지 수년이 지난 어느날 봄이었다.
풍문에 이 고장 사또가 민정을 시찰하러 이 마을을 암행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아 온 마을이 수군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사또가 이 마을을 지나 잣들로 행차하신다고 하였다.
온 마을이 어수선하고 전에 없던 나졸들의 출입이 있더니 동구밖 저 멀리서 사또 행차가 다가왔다.

“어라 쉿! 사또 행차시다. 행인은 길을 멈추고 농사꾼은 고개를 숙이고 읍하라.”

하는 호통이 온 마을을 흔들었다.
이 행차는 바로 이 마을을 거쳐 새재를 넘어 양백리로 가는 길이다.
이 재는 가파르고 길도 험하지만 잣들로 가는 지름길이다.
주로 마을 사람들의 초로길로서 이 재의 산기슭에 초군들이 쉬었다 가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원님 행차가 이곳에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 때 부녀자 한 사람이 달려와 감히 아뢰옵기를

“사또 행차에 아녀자로서 당돌하오나 골수에 맺힌 한이 있어 여쭈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행차에 누가 될까 두려운 나졸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그 부인을 꾸짖고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 부인이 발길을 돌려 통곡을 하며 돌아가는데 그 울음 소리가 온 고을을 울렸고 사또의 귀에까지도 들리고 말았다.

젊은 사또는 평소에 고을에서 명관 사또라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아왔다.
사또가 그냥 지날 리 없었다.

“이 골짜기에 웬 아낙네의 울음소리냐? 실정을 아뢰라.”

하고 말하였다.
나졸들이 사또에게 고하는 말을 자세히 듣고 직접 그 부인을 만나서 물었다.
이 때 그 부인은 근엄한 현부 자세를 갖추고 팥죽 한동이에 수답을 배앗긴 사연을 아뢰었다.
부인의 화술과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여 동행하던 관헌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사또는 부인의 말에 감동하여 즉석에서 박씨를 불러 판결을 하였다.

“이놈의 악한 여죄가 낱낱이 드러났다. 이 악덕 박가를 벌하고 억울한 양민의 재물을 모두 되돌려 주게 하라.” 고 하였다.

그 이후로 이논을 (팥죽배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이름을 원님이 지나갔다 하여 원통리라 했으며 새재로 불리던 재를 원님이 넘었다고 하여 그후로는 원넘이재로 부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문헌상의 기록은 없지만 전설로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은 원산리 저수지 공사로 팥죽배미는 수중에 잠겨 형상조차 볼 수 없지만 이야기는 계속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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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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