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면

함양의 전설

정여창선생과 아리랑고개 [소의 목을 잘라 길을 낸 선생]

안의면 당본리 죽당마을과 월림리 사이에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안의면 소재지에서 약 1 km 지점에 위치한 이 아리랑고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성종3년,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난 정일두(정여창)선생은 영리하고 지혜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담이 크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난 분이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하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열심히 학문을 닦아서 청운의 큰 뜻을 품고 과거를 보려고 한양을 향해 집을 떠나게 되었다.

평소에 효성스럽고 남달리 조상을 섬기는 선생은 한양으로 떠나는 전날 선현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조상님들에게 온 정성을 기울여 합격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머나먼 여행길을 떠나는 날 정여창 선생은 종자 한명만을 데리고 괴나리 봇짐을 꾸려 집을 떠나 한양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어서 안의에 도착하게 되었다.
안의를 거쳐 화림동 계곡으로 육십령 고개를 넘어 옥천으로 가는 한양길을 택하여 북상할 계획이었다.

날씨는 무척 덥고 모퉁이를 돌고 고개를 넘어 모처럼 걷는 걸음이라 아침에 입은 두루마기는 땀에 젖어들어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거기에다 부채까지 팔랑이면서 자그마한 키에 총총걸음으로 젊은 선비가 걸어가는 그 모습은 한마디로 볼품이 없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안의에 도달했을 때 이 마을 몇몇 심술궂은 젊은이들이 정여창 선생을 놀려볼 양으로 종자의 등 뒤로 가서 괴나리 봇짐을 잡아끌며 짓눌러서 나자빠지게 하였다.
종자가 길바닥에 벌렁 나자빠지자 이것을 보고 있던 정여창 선생은 점잖게 꾸짖었다.

“너희는 웬놈들이기에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행패를 부리며 방해하는 거냐.”

하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조그만 놈이 웬 목소리가 그렇게 큰가. 대체 나그네는 어디에 살며 어딜 가는거냐”

하고 젊은이들은 시비를 걸어왔다.
이에 정여창 선생은 화가 나서 과거 보러 한양간다고 얼굴 하나 까딱하지 않은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여창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당황한 젊은이들은 잠시 멈칫멈칫하다가

“네 몰골 주제에 과거라니 어림없는 소리.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하하하 과거? 과거라니 하하하”

하고 자기네들끼리 통쾌하게 비웃고 있었다.

정여창은 갈길이 멀고 이러한 놈들과 시비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여 이런 말들을 한귀로 흘려버리고 다시 종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을 조용히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 우루루 몰려와 앞길을 가로막고는 가는 길목에다가 가래침을 뱉았다.

젊은놈들의 이러한 모욕과 굴욕을 당한 정여창 선생은 분함을 꾹 참으면서 '이놈들 두고 보자 내 꼭 그 행들을 갚아주리라' 하는 마음을 욱다져 먹고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종자에게 길을 재촉했다.

정여창 선생은 처음부터 피로하게 출발한 길을 열흘도 넘게 걸려 겨우 한양에 도착하였다.
며칠을 푹 쉰 끝에 드디어 과거의 날이 되어 시험을 치루었다.
평소에 성실하게 공부를 하고 성리학에 밝은 그는 무난히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다.

그 후 선생은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봉양하기 위해 고향 가까운 안의 현감으로 발령받기를 원했다.
마침내 조정에서도 정여창의 청을 들어주어 그가 원하던 대로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을 뵙고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다는 기쁨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현감이 안의에 부임하여 지세를 살펴보니 소가 물을 먹고 있는 형의 산세였다.
지형으로 보면 안의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고을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과거를 보러갈 때 청년들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지금의 안의 초등학교 뒤 대밭산이 소의 몸둥이고 교동마을 맞은 편이 소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몸통과 머리사이 목(현재 아리랑고개)을 잘라놓아야겠다고 생각하여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노폭 4미터의 길을 내고 소머리쪽 교동마을에는 소를 잡는 백정들을 모아 살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지세의 맥을 잘라 지력을 약화시킨 이후로 안의에는 한발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곤 하였다. 그 뒤에 부임한 현감들이 아리랑 고개에서 변을 당하는 등 이 지방에 각종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모욕을 당한 정여창 선생이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마을의 지세를 끊어놓았던 탓이라고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안의 현감들이 재물이 수동쪽으로 흘러 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봉을 세우고 교동마을 백정들은 딴 곳으로 이주케 하니 다시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아 살기좋고 인심 좋은 고장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그 오봉은 안의에서 밤숲마을로 내려가는 들판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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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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