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면

함양의 전설

정여창의 효심 [강물이 갈라지게 한 효성]

나이 8세된 백욱은 그의 아버지 정육을이 의주로 부임하게 되어 그를 따라 가게 되었으며 의주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순탄하여 막힐 것이 별로 없이 넉넉한 편이었다.
따라서 환경과 분위기는 학문을 익히는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정육을의 집에 장영이라고 하는 명나라의 사신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육을과 장영은 정담이 오고 갔고 육을은 아들 백욱을 장영에게 소개하였다.

“얘가 제 아들입니다. 학문을 좋아하여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는 다른데가 많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빠짐없이 꽉 차 있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오.”

“이 아이에게 아직까지 이름이 없으니 사신께서 이름이나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은 여창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어 주었다.

장영은 여창이라는 말이 장차 집안이 번창하고 길이 영화를 누린다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하여 주었다.
여창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서재에 들어박혀 학문에 더욱 더 힘썼고 어머니의 가정교육에도 남다른 데가 많았다.

그러나 나이 18세 되던 해 여창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닥쳐 왔으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당시 의주 고을은 평온함이 계속되었고 백성들의 생활도 불편함이 없던 터였는데 길주의 호족으로 이름 있는 이시애라는 사람이 북쪽 지방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북도의 수령을 남도의 인사로서 삼는 것이 부당하다고 북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난인데 이 난을 이시애의 난이라고 한다.

정육을은 이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 이시애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깝게도 순직하고 말았다.
여창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 한달간이나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전쟁터를 헤매다가 겨우 찾아 그의 고향에 모셨으니 그의 효심은 실로 가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조정에서는 그의 아버지 육을의 무공을 높이 평가하여 그 영예를 아들인 여창에게 내리려 하였으나

“무관은 무관으로서의 맡은 바 자기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영예라는 것은 당대에 본인에게서 그치는 것이지 결코 후손으로서는 그 영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사양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 최씨는 자식 교육에 대하여 더욱 정성을 쏟아 여창을 돌보면서 늘 훈계하기를

“아비없는 자식이 배우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말 한마디로 하여금 여창이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는 것은 오로지 학문을 열심히 닦는 길밖에는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중국 진나라 소진의 고사에서 나온 소진자고를 사표로 삼았다.(소진은 학문을 하면서 졸음이 올때면 잠을 쫓아버리기 위해서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찔러 열심히 공부하여 끝내는 6나라의 승상이 된 인물이다.)

정여창은 학자로서의 양심과 덕을 키워 보겠노라고 아버지의 남긴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무인의 길을 문인으로서 행하는데 쉬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삼년간 학문에 열중하여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등 오경에 밝게 되었고 성리학의 진리를 더욱 깊게 탐구하였으니 드디어 사물의 본체와 그 운용이 곧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은 근본의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하였다.

효자는 효자이기 이전에 충신인 것이며 충신은 충신이기 이전에 효자라는 말이 있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은 조정에까지 알려진 바도 있다.
일찍이 의주에서 아버지를 사별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학문을 익히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선생은 홀로 된 어머니의 괴로운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 호롱불 밑에서 옛 성현들이 남긴 이야기를 들려 드렸고 자기가 공부하는 대목에서 길이 남을 만한 글이 있으면 쉽게 풀어 드리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렸다.
또 노모님의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아버지의 신주를 모신 방에다 향을 피워 명복을 빌면서 노모의 병환을 자기가 대신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했다는 것이다.

정성을 다한 마음과 열정으로 간호를 드렸지만 끝내 어머니는 운명하고 말았다. 선생이 어머니의 묘를 승안사 경내에 쓰려고 하자 승려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 때 갑자기 뇌성벽력을 치더니 소나기가 쏟아져 홍수가 나고 강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게 되자 선생이 불효자의 불효한 죄로 이렇다 하여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며 부르 짖으니 홍수가 갈라지고 운상을 하였다.
이것을 본 승려들은 하늘이 아는 효자라고 하며 스스로 절을 떠났다는데 그 뒤로 절은 폐사(廢社)가 되었다고 한다.

모친상을 마친 후 나라에서 그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군관에게 명하여 묘소와 비문을 마련해 주도록 했으나 선생은 굳이 사양했다.
그 이유는 백성에게 노고를 끼치면 그 원성이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또 어머니의 산소를 지킬 때에도 밥을 먹지 않자 이웃에서 밥을 지어다 드렸지만 이것마저 사양하고 삼년동안 어머니 묘소 곁에서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냈던 효자였으며 마음이 곧고 뜻을 굽힐 줄 모르는 선비였다.

정여창은 영남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윤리와 그리고 의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학문의 경지가 깊어지자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학문에 대한 이해도를 측정하는 시험도 치렀으며 어떤 경우에는 스승을 능가하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창은 겸허하게 스승의 가르침에 열중하며 마음과 학문을 닦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그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으나 단 하나 한훤당 김굉필은 둘도 없는 친구로서 사귀었는데 성리학을 추구하는 학자였으며 가는 길이 같았고 뜻이 또한 같았기 때문에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남달리 서로 아끼는 사이가 되었다.
스승 김종직의 문하에서 스승과 두 제자의 뜻이 같았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 사이는 더욱 가까웠다고 한다.

여창은 효와 충, 의 등 윤리면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많았기에 여기에 소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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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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