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면

함양의 전설

유자광의 고모와 대문밖 들 [고모집을 망하게한 서자 유자광]

조선조 오백년을 통해서 권좌에 올라앉아서 권력을 남용하고 국정을 휘두르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의 인물을 한 사람만 말하라 한다면 유자광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문제의 인물이요, 말썽이 맣아 두고두고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보기드문 영웅호걸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가장 간사하고 무자비한 간신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벼슬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무령군에 봉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천한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아들을 구별하여 정실 아내가 낳은 아들을 적자라 하였고 둘째부인 셋째부인에게서 낳으면 서자라고 하였으며 그도 아닌 종년이나 천민의 몸에서 낳으면 얼자라 하였다.
유자광은 이 중에서도 서자도 아닌 얼자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헤아릴 수 없는 천대와 멸시를 받아왔다.

서자나 얼자는 벼슬을 할 수 없으나 유자광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오늘날 숱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는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정랑이라는 전무후무한 특채로 기용된 셈이다.
적자도 아니고 서자도 아닌 얼자가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날 같으면 가장 큰 인사비리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임금 마음대로 하는 세상에서 문제 될 바 없는 일이다.

그는 세조 14년에 문과에 급제 하였고 벼슬에 올라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오르기도 했다.
조정에 굳은 기반을 가진 기성세력 훈구파의 한 사람이 되어 영남 출신인 사림파들과 항상 사이가 좋지 않았다.
뒤에 무오사화를 일으키어 영남의 사림파를 무참하게 죽이니 조야에 적이 많았고 결국 중종 7년에 강원도에 유배되어 적소에서 죽었고 구 뒤 부관참시(무덤을 파서 그의 시체를 목자르는 형벌)를 당했다.

우리 고장에는 유자광과 김종직, 그리고 유자광의 고모에 얽힌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함양에 있는 고모님에게 인사차 방문해서 그의 고모댁을 망하게 한 이야기다.

지곡면 마산리 수여마을 앞에 있는 들을 대문밖 들이라 하였다.
옛날 연산군때 이 대문밖들에 세도를 누리는 큰 기와집이 으리으리하게 서 있었다. 이 세도의 집안은 유자광의 고모네 집으로서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자손이 번성하여 우람한 기와집에 소슬대문이 높이 솟은 것은 이 집의 가세를 말해주듯 날로 번창하는 세도가 당당한 집안이었다.

이러한 때에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인사차 고모댁에 들렀다.
유자광은 서자 출신이라 적서의 구별이 엄격한 시대이기 때문에 아무리 관찰사라 할지라도 서자 출신이므로 고모 앞에서는 법도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유자광이 고모네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대문 안으로 들어온 그는 방안에 앉아 있는 고모를 보고 말씀을 드렸다.

'고모님! 마루에 올라가서 인사를 드릴까요? 마당에서 인사를 드릴까요?”

하고 아뢰었더니 고모는 돗자리를 마당에 던지면서

“마당에서 인사를 올려라.”하고 말하였다.

그 당시의 법도가 서자는 방안에 들어가서 인사를 못하고 마당에서 하인처럼 인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벼슬자리에 있어도 서자는 서자이고 하물며 다름 아닌 고모 앞에서 감히 마루에 올라와서 절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마당에서 절을 올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가슴에는 서자로서의 설움을 받아온 한이 맺혀 있었다.
벼슬을 했지만 오늘도 이렇게 설움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늘 당하는 일이라서 서운하고 분함을 참으면서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내심 복수의 묘책을 생각하며 태연하게 마당에서 인사를 올렸다.

“날로 고모님댁 가운이 번창하시고 이름이 사방에 떨치며 많은 인재가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은 하늘의 뜻이요. 또한 이곳의 지세가 좋은 탓인줄 압니다. 그러나 이제 그 운도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곳 몇 군데에 손을 쓰면 영원히 집안의 세도가 번창하고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집안이 계속 유지된다는 말이냐?”

“제가 보기에는 이곳 지세가 앞뒤산의 산줄기가 맞닿아서 이 마을을 한 곳의 틈도 없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래를 기약하기 어려울뿐 아니라 집안의 운세도 한정되어 있는데 이제 그것이 이미 절정에 도달해 있습니다.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는 끝내 어떤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요사스런 바위입니다. 또 다른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성황당 고개이고 또 한 곳은 웃골을 통하는 고개입니다. 이 두 곳을 훤히 트고 요사스러운 바위를 제거하면 자손 만대가 더욱 영화를 누리고 이 마을이 크게 번창할 것입니다.”

하고 그럴듯하게 둘러대고 돌아갔다.

이말을 들은 유자광의 고모는 몇 날을 두고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마음이 찜찜하다. 듣지 않아야 할 말을 들은 것이다.

동리 입구의 바위가 요사스럽게 보이기도하고 두 고개가 막혀 있으니 틔우면 좋을 것 같기도 하였다.
유자광의 못된 마음을 알리 없는 그의 고모는 손을 보기로 결심 하였다.

마을 사람들과 하인들을 시켜 바위를 깨기 시작하였다.
바위를 깨뜨리니 뜻하지 않게 바위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지라 놀라서 엉겹결에 흙을 덮어 흐르는 피를 막았다.
성황당 고개를 끊고 북으로 통하게 하니 난데없는 학이 날아 나와 멀리 북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세번째로 웃골 고개를 끊으니 하얀 서릿김이 하늘 높이 솟았다고 한다.

그 후로는 가운이 날로 쇠퇴하여 드디어 가정이 완전히 망해버리고 마침내는 동리마저 폐동 되어 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을 파면 옛날의 기왓장이 나오고 비루바위에는 비만 오면 바위 위에 핏물이 고인다고 하여 바위를 깨낸 자리에는 옛날의 바위 형태를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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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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