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천면

함양의 전설

오누이 비 [가난한 오누이의 비운]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요, 충효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따라서 훌륭한 학자의 비석과 효자나 효부의 비석이 도처에 많이 흩어져 있는 고장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학자나 효자 효부가 많이 나온 고장이라는 뜻도 된다.

그런데 고을마다 즐비한 비석을 보면 효자나 열녀 효부들의 비석은 많이 있지만 오빠와 누이동생의 비석이 있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요, 우리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비석이 아닌가 한다.

휴천면 목현리 면소재지에서 함양 쪽으로 약 1km 가량 나가다 보면 임호마을로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갈림길에 오누이 비가 있었다.
이 비석에 관한 내력이 전해오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때는 1587년 봄으로 함양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오누이가 있었다.
먹고 살아가기가 막연해서 산골로 찾아온 곳이 지금의 휴천 땅이다.

이들 오누이는 함양박씨 문중에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한 처지여서 그 가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먹고 살아가기가 힘들어 이 휴천 땅으로 정착지를 옮겼다고는 하나 역시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경을 할 수 있는 땅이 있는 것도 아니요,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만한 처지도 못되었다.

“누이야, 이곳이라고 해서 우리를 위한 기와집이나 문전옥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산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굴 산도 없구나.”

하고 오빠는 수척한 여동생의 얼굴을 안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어떻게 살아갈까요?”

“나는 어느 부잣집에 들어가 몇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해야겠구나. 부지런히 일해서 세경을 모아 초가삼간이라도 마련하고 소라도 한 마리 사고 싶구나. 또….”

“오빠, 같이 노력하면 살길이 나오지 않겠어요?”

오빠는 또 어린 동생의 말을 들으면서 너무나 가슴 아프고 어린 동생에 대해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누이야, 우리 헤어졌다가 10년 후 다시 이곳에서 만나자. 오늘이 칠월 열아흐렛 날이니까 10년 동안만 우리가 고생하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니?”

서로 약속을 나누고 헤어진 두 남매는 그 후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 돈을 벌었다.
세월은 빨리도 흘러갔다.
오누이가 만난다는 일념아래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열심히 일한 탓이리라.

10년의 세월이 흘러간 그 날 당초 약속한 장소를 찾았다.
십년동안 헤어져 살아왔던 지난 날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리라는 꿈에 부푼 가슴을 안고 약속한 장소를 찾아왔던 것이다.

오빠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정오가 넘어도 누이는 오지 않고 해질 무렵까지 기다렸으나 누이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오빠는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이 지나갔다.
이제 오빠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지금 조선 땅에는 바다건너 왜적이 쳐들어와 몇 년째 살육과 찬탈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잔인무도한 왜적의 만행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산너머 어느 누구의 어미와 그 딸이 왜놈들에게 능욕을 당해서 어미는 서까래 끝에 목을 매어 죽고 딸은 미쳐서 임신한 배를 움켜지고 온 동네를 떠돌면서 웃어댄다는 것이었다.

민족적 비극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인심은 메마르고 온갖 소문은 흉흉하게 떠돌았던 것이다.
오빠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위로하며 내 누이동생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며 성황당 당신이 돕고 하느님이 잘 보살펴 주시리라 믿었다.
오빠는 갈수록 더욱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자위하면서 하루를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해질 무렵에서야 멀리서 어떤 여인의 그림자가 오빠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옳거니, 바로 내 동생의 그림자로구나.'
아! 이 반가움이란…!

'내가 노력해서 번 돈으로 동생의 혼인을 시켜주고 나도 아내를 맞이해 행복하게 살아 봐야지.'
그때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부르짖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동생의 목소리였다.
누이동생은 갑자기 나타난 무장한 괴한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괴한들은 다름 아닌 왜적이었다.

당시의 왜적들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약탈한 다음에는 방화하고 여인들은 능욕한 다음에는 죽이는 것을 서슴없이 행했다.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는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사무치는 것도 역사적으로 이런 악질적인 만행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오빠는 황급히 달려가 누이동생을 구하고 싶었지만 잔인한 살인무기를 휘두르며 금수와 같이 날뛰는 그들을 어떻게 당할래야 당할 수가 없었다.

동생이 능욕을 당하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인 오빠로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오빠는 누이의 시체를 묻어놓고 지나온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난과 싸우면서도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라보리라는 각오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오빠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슬픔과 괴로움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호사다마라고 해야 좋을지 흥진비래라고 해야 좋을지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진 오빠, 그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괴로움을 잊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다가 참을 수 없어 끝내는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음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죽음으로써 앞서간 누이동생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 인근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이 세상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이 오누이의 영혼을 위로하고 순결과 의리에 대한 후세인의 귀감을 삼고자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오누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석이 서 있는 그곳이 삼거리가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곳을 오누이 비석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석을 세운 후 몇 년 동안은 추모제를 올렸다고 전해져 온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휴천과 함양읍 사이에 신작로가 나는 바람에 비석은 어디엔가 묻혀버려 찾을 길이 없고 비석을 받혔던 기반석은 지금도 개울가에 버려진 채 400여년 전의 역사의 비운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오면서 그 비석의 기반석 마저도 그 흔적이 상실되려는 현실 앞에서 역사의 유물을 보존하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신의와 참된 인간애가 존재하는 한 오누이 비의 그 진가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보석으로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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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0 1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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