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자 인터뷰

차용현 유족회장 구술

작성일
2025-08-19 16: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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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빨갱이 분자들이 있었어.
함양군에서 도북이 젤 못살았어.
못사는 동네에서는 공평하게 잘 살게 해준다캉께 그런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기라.
처음에는 잘 사는 집에 찾아다녀서 그런 소릴 했는가비라.
잘사는 동네에는 이북사상이 잘 안 들어가.
빨갱이들이 공산주의 하라고 요구하고 안한다 하면 뚜디리 패고 살림살이를 다 조져버리고 박을 깨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 부자들 몇 집이 못살고 살림살이고 뭐고 집이고 다 놓고 나가 버린거라.
그때 여 못사는 그런 놈들 공껄로 그런 집 주워서 살고 했어.
야튼 군에서 알고 그 빨갱이들 셋집에 불을 질렀던거라.
그래서 그 사람들 집이 불탔으니까 산으로 올라갔는데 올라가서 달집모양 아지트에서 살다가 굴도 파서 살다가 저녁이면 또 양식을 얻으러 내려오고 하는거라.
총을 들이밀고 달라하는데 안줄 사람 어디있냔 말이야.
그때는 총이 젤 겁나는 물건이었는데.
나뭇대로 만든 문에 한지 발라놓은데 총을 쑥 들이밀고 쌀 좀 내라 소 마구에 있는 소 줘라 하는데 안주면 한 놈 죽여 놓고 가니까 안 죽을라면 줘야지.
또 그러면 아침에는 지서에서 빨갱이 밥 줬다고 뚜디리 패고.
부락사람들은 그래도 정부에 협조를 할라고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서고 하다가 산으로 올라갈라하는 이발사를 하나 잡아다가 경찰에 넘긴기라.
안 잡아 넘기면 맨날 군인들 지서에 와서 빨갱이 많다고 부락민들 쏴 죽일 판이고 밤에는 저 산에 있는 빨갱이들이 내려와서 협조하라고 쏴 죽일 판이고. 그러니 진퇴양난 아니가.
그러니 보초서는 사람들이 그때 말하기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다. 그래도 정부에 협조하고 죽자 하는 심정으로 했던기라.
그때는 이발을 할 때 그때그때 현금주고 하지 않고 한집마다 가을 내기를 했어.
가을에 나락 걷으면 그때 이 집은 몇 명이라서 몇 되, 이 집은 한 명이니까 반 되 이런 식으로.
그래서 그 이발소 명단에 동네사람 이름이 다 적혀 있었던 거라.
그런데 이걸 이용하기를 그 이발사가 내 목숨 하나랑 이 동네 사람 목숨 다 합한거랑 똑같은거다 하고 악다구니를 하고 잡혀 간거라.
그리고 그 장부에 있는 대로 싹 빨갱이라고 적어준거라.
경찰서에서는 그냥 그 명단만 하나 들고 와서 회관 앞에 징을 치면서 동네사람들 다 나오라 카는데 우리 아버지는 저 아래 연자방아 있는데서 보리를 찧고 있어서 못 들었을랑가 싶어서 내가 얼른 뛰어가서 소식을 전한기라.
나는 또 모이라 할 때 안모이고 하면 뚜들겨 맞고 총살 당하고 할까봐서 무서워서 얼른 가서 전한기지.
아버지 저기 동네 사람들 나오라 카는데 어서 가보셔야겠다고.
그래서 방아 찧다말고 올라가셔서 그 길로 못 오셨지.
죽일 줄 알았으면 안갔을 낀데 그런 거는 생각도 못하고.
동네서 그래도 눈치가 있던 사람들은 도망도 가고 숨고 했는데 경찰 셋이서 동네 사람 다 감당을 못하니까 순순히 나온 사람들만 새끼 꼬운 걸로 한사람씩 엮어서 외줄로 데려갔지.
그냥 끌려가는 줄 알았지.
그길로 끌려가서 수동지서는 쪼그만 해서 감당을 못항께 군부대로 그날 저녁에 넘겨가지고 빨갱이도 아닌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이발소 하다 끌려간 빨갱이 그놈이 회전의자에 딱 앉아서 담배 꼴아 물고 동네사람들 가려내는 기라.
마을에서는 공산당 보다 대한민국 살리자고 빨갱이 잡아다 주었더니 이것이 화근이었어.
마을 청년들 40명 그 다음날은 치라골 20여명을 홅아서 끌고 가 이틀이나 밥도 안 먹이고 가둬놓고 한사람씩 끌어내서 담배물고 있는 빨갱이 앞에서 우리 아버지랑 빨갱이 잡아다 준 동민들 한사람씩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살려달라고 구하게 했어.
살려달라고 하자 빨갱이 그놈이 “너도 나한테 양식을 주지 않았냐” 하면서 말하면 그때부터 경찰과 군인이 몽둥이로 사람들을 개 패듯이 패기 시작해서 전기로 지지고 거꾸로 매달아서 고춧물을 붓고 그렇게 했어.
그 이발사는 다 했다하고 부락사람들은 안했다 하고, 부락사람들 입에서 했다 소리 나올 때까지 두들겨 패는 거라. 그래도 안 되면 전기로 지지고 그것도 안 되면 가꾸로 달아매고 코에다가 고춧물을 들이 붓는 기라.
그렇게 해서 그 다음날 사람들을 차에 엎어 싣고 당그래 산으로 가서 구덩이에 묶어놓고 총을 쏜 다음 죽지도 않은 사람들을 끌어 엎어놓고 기름을 갖다가 사람들한테 붓고 불을 당겼던 기라.
60여명이 불에 타는데 그 연기가 우리마을 도북에서 보였어.
공장에 불이난거 같았어...
이때 경찰 민정청년단은 죽창 들고 마을에 올라와서 몇 시간 내로 집을 비우지 않으면 불 지른다고 해서 주민들은 자식새끼들 등에 업고 보듬고 길거리로 나와서 연기 올라 오는거 보고 도북골짝은 동네 사람들 울음 통곡소리로 가득 메웠어.
이런 이야기는 그때 잡혀갔다가 돈을 써서 살아 나오신 우리 백부님이 이야기를 해주신 기라.
세 사람을 빼 낼라 했는데 돈이 모자랐는지 백부님 한분만 나오시고 이튿날 돈을 더 마련해서 가는데 이미 당그래 산으로 갔더라고.
그 전에는 그 학살당한 자리가 다 밭이 있고 논이었고 그랬어.
거기 밭 주인이 도북사람들 처형하는 것을 숨어서 보고 학살 관련해서 증언을 해 주신기라.
도북에 자기 자형인가 누군가가 있어서 도북사람들을 알아 본기라.
그때 이 일을 파고 다닌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
그리 사람들 당그래산으로 끌려갔다는 소리 듣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그 당시 민정 청년단이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시켜서 도북민들을 아랫동네로 소개(대피)를 시켜버렸어.
광주처럼 막 들고 일어날까봐 겁이 났는지 시간 안에 비우라고 윽박질러 싸터라고.
그때 도로가 있나 차가 있나 뭐가 있노.
다 싸서 들고 내려가야되는데 정신없이 보따리 들고 피신하면서 길에 앉아서 울었어.
그때 동네서 당그래산 연기 피어올라 오는 게 보였는데 그때는 몰랐는데 사람한테 기름을 부어서 태운 기더라고.
소문은 빨라서 그라고 나면 사람들이 다 말이 들어와.
지금 생각하면 어찌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는지 몰라.
내가 군인이라도 아무리 옆에서 높은 사람이 시킨다 해도 그놈 쏴죽이고 나도 죽고 말지 어찌 사람한테 기름을 부어서 불을 지르는 그런 짓을 한 걸 생각하면 나는 진짜 대한민국 아직 멀었고 천벌 받아야 된다는 생각밖에 안들어.
나는 그때부터 유골 찾아다가 합동묘 만드는 그날까지 정말 하루도 생각을 안 해본 적이 없어.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우리 또래들은 피를 토할라 하고 울부짖을라 카는데 지금 칠십 몇 살 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때 태어나 놓으니까는 고마 뜨르뜨르 하고 그른가 보다 이렇지 별의 별 것을 못 느끼더라고.
서춘수 군수만 해도 마천서 그런 일을 당해도 어려서 그래 놓으니까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고. 우리는 그때 열둘 열세 살 되어 놓으니까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우리가 그 가정에 호주라 해야 되나... 생활 주인이 돼야 되는 기라.
그래놓으니까 고생을 해도 무진장 했어.
야들은 그때 태어나서 어른들 품에서 컸지. 고생도 몰라. 확실히 그런 게 틀리더라고. 그때 우리는 그 난리를 당하고 나니까 먹고살게 젤 걱정이었어.
저기 마천이니 이런 골짜기에는 보면 고만 그때만 해도 흉년이 많이 들어서 나도 뭐 누가 있노... 동생들 있고 이러니까 우리 어머니 따라서 이 높은 산, 옛날에는 이 도북 높은 산 저 너머에서 나무를 해 와 가지고 풀 베어 가지고 하는 게 예사라.
그래가지고 또 뭔 양식을 보태야 되냐면 나무 막 크게 올라오는 거 있으면 그거 베어 넘겨가지고 꺼풀 베껴가지고 속에 꺼풀 그거 해가지고 와서 울궈가지고 칼로 쪼사가지고 그걸 밥에 놔서 섞어가지고 묵고 이런 식으로 했거든.
첫째는 먹고사는 거 그게 제일 힘들었어. 우리는 그리 고생을 했는데 이 사람들은 그런 걸 안 겪고 큰기라. 그래놓으니까 고생도 모르고 지금도 인자 우리는 죽을 때가 다 된께 생각이 나는기라.
지금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쌔가 빠지게 고생만 하고 이러다가 세상 끝을 마치는 게 어디 있노.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래. 지금 모두 사는 거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는 이런 식으로 살라고 이 세상 태어났나 싶고 이것도 사람 사는 긴가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랬어.
젊은 사람들 그걸 몰라. 그걸 아는 사람이 내가 알기론 이제 안의에 하나 마천에 하나 그리 있어. 백전에 또 하나 있고 그 외에는 함양 후배들도 서하에도 휴천, 안의에 있는 사람도 돌아가시고 그런 분들은 이걸 아는데 참 마음이 원통해. 그런 걸 젊은 사람들은 몰라.
그래서 내가 참 더 딱하고 그래.
우리는 그 현장까지 따라가서 학살된 장소까지 알고 그때 참 간도 크기도 컸지.
그 시절에 그러고 다니면 잡아 죽일라고 했는데 동네 여자들이 한 사십 명 갔었거든. 그래놓으니까 그때 뭐 등신 같은 것들이 죽을 길 살길도 모르고 막 따라 갔제. 그래서 막 씨 뚜디리 맞고 그르고 왔지. 그때 같이 갔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
우리 어머니도 지금 계셨으면 백 살이 넘었제. 그런 사람들은 다 죽었어.
내가 가만히 봐도 누구한테 이걸(회장을) 넘겨 줄라 해도 누가 와서 물으면 답할 사람이 없어.
그러니 딱하고 내가 젊은이 하나를 데리고 돌아봤거든.
박정희 노태우 그런 사람들 대통령일 때 거창 신원에 가니까 여자 남자 유골을 따로 묘를 써 놨더라고. 대충 가려 가지고 해놨더라고.
그래서 비에다가 글을 썼는데 그거 세워놨는데 정부에서 그걸 없애삐라고 해서 막 쪼아가지고 눕혀 버렸더라고.
그런 걸 보고 산청 방곡도 가니까 거기는 여자 남자 합동으로 유골을 모아놨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도북 여기 한 40명 넘게 그걸 당하고 오고 그때는 면적이 여기 우리집 거실 터 만큼밖에 안될 끼다. 그런데다 학살을 시켜 놓으니까는 덮는 흙도 얄라궂이 찌트려 놓으니까 시체가 보이고 그랬어.
다리가 나오고 막 부패가 되고 이랬는데 그때만 해도 이걸 뭘 보고 찾느냐 이래싸코 뭐 이빨 보고 찾는다 뭐 신발 보고 찾는다 이래싸코 했는데 그 뭐가서 씨리 당하고만 왔는데 쫓겨 가서 하지도 못하고 그러니 그 뒤에 나는 생각을 했지.
어떻게든 이걸 파와야겠는데... 어떻게든...
그래도 우리 백부님이, 백부님은 우리가 돈을 써서 빼냈거든.
그래가꼬 사촌 바로 동생하고 이제 둘은 그 자리에서 학살당하고 자기만.
원래 내가 세 사람을 빼낼라고 돈을 줬는데, 그 사람이 육군 대위 정도 되더라고. 밥때까리 칸이 세 개더라고.
그래 인자 나올 끼라고 마중을 가는데 그 대위가 차를 타고 가길래 물으니까 두 사람은 아마 돈이 작아서 그랬을끼라... 기억이 안 나서 못 내놓고 한 사람만 내놓고 간다 이기라.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부탁 해놨응께 해줄끼요 이러더라고.
그라고 나서 내가 집에 돈 가지러 다시 와 가지고 황소 한 마리 있는 거 소장수한테 잽혀 놓고 또 돈을 가지고 그때는 함양 여기를 차 없어서 다 걸어 다녔어.
그 강물 건너서 걸어 다니면 또 그때만 해도 우리 애들이 동네 건너가면 아들한테 뚜들겨 맞아.
요 가면 요기서, 또 저 밑에 가면 저 밑에 마을 사람들이 골짝 사람들 촌놈들이 오면 길에서 애들이 놀리고 뚜들겨 패. 그런 걸 감수해 감서 가고 했는데 그 이튿날 다시 가니까 다 죽여서 막 싣고 나왔던데 뭘.
그래가꼬 내가 어째도 우리 아버지 뼈 찾아오지 싶어서 일 년에 한 번씩 거를 갔어.
어떻게 변하는지 보자하고 몇 년 더 있으니까 그때가 몇 년도에 비가 많이 와가지고 우리나라 수해 오고 했을 때... 매미 였는가 모르것다.
그 후에 현장을 가보니까 희한하게 저 옆에 산 날망으로 밑으로 많이도 아니고 딱 볕 자락 한 줄기로만 흙이 떨어져서 직통으로 내려와서 덮었더라고. 거기 묘가 생겼더라고.
그래 “야 하나님이 이리도 도우는구나” 하고 거기가 이 한 뼘은 골짜기가 되니까 물이 내려와서 안됐었는데 한편으로는 묘를 덮어놨으니까 거기서 이제 나무가 나고 하니까 우리가 파러 갔을 때는 나무랑 아카시아가 많이 컸더라고.
그래서 흙이 많이 덮여 있으니까 위에서 파서는 도저히 안나오는거라.
“이거 잘못 짚은거 아니가” “다른데 아니가” 하니까 나도 이제 분명히 여 터이기는 한데 이상하다... 그래가지고 밑에 옆을 파고 들어가 보니까 유골이 나오는 거라.
그때부터 힘을 얻어가지고 그렇게 많이 덮여 있는 걸 파내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유골 파는 전문가가 아닌데 희한하게 잘 파냈어.
그런데 파 보니까 그때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여자 머리가 하나가 있고 옛날에 우리는 고무신 신었거든. 고무신하고 단추가 옛날에 보하니 하얀 게 있었는데 단추하고 그런 게 있더라고.
아이고 나는 이 얘기만 하면 얼굴에 소름이 확 돋아.
그래서 파는데 옛날 민방위니 무슨 청년단 하고 그 산에 쫙 깔리더라고.
그때 형사 하나는 내가 주동한 걸 알고 식당을 가면 식당을 따라오고 다방을 가면 다방을 따라오고 뭐 어디든 따라다니는 기라.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우리는 조용히 법대로 해가지고 조용히 끝낼 거니까 그래싸치 말라고 해도 웃어싸코 따라 댕기는 기라.
하도 따라다니니까 나중에는 부아가 나는 기라. 부아가 나가지고 이 씨 마한놈것 다 싣고 경찰서를 가서 마당에 풀어놓고 난리 한번 지길까 싶다가도 아이고 좋게 해야지 좋게 그라고. 그래쌋는 거 보고도 우리는 유골을 찾아다 싣고 와가지고 저 장소에 묘를 쓰고 거 뭐 여자는 하나니까 놓고 남자들은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유림에 가서 뼈 만지는 기술자를 불러 가지고 무조건하고 위에 뼈랑 밑에 뼈랑 두는 두 대로 위에 쫙 놓고 그래 묘를 쓰고.
비에다 글을 쓰고 하는 것도 해야 되는데 내가 공부를 못했어. 열두 살 돼서 학교를 못 갔던 거라. 그때 이 동네에 그 난리가 나서 열세 살에 졸업인데 학교고 뭐고 졸업식도 못하고 그냥 졸업 인기라.
그래서 중학교를 갈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즈그 아버지가 있어. 우리 또래도 다 있는데 아버지 없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 다른 애들 칠십 몇 살 요것들은 즈그 아버지 없는 사람이 없어. 그것들은 몰라.
근데 우리 또래는 다 아버지가 있는데 그때 그 난리가 나고도 다 중학교를 가는 기라. 나는 중학교를 못 갔어.
우리 사촌 형님이 생초초등학교 교장 했는데 나를 중학교 입학하라 싸트만은 생초중학교 그때 창설했었거든. 그러니까 머리 딴 아가씨들이 있고 그렇더라고.
근데 우리 어머니가 죽어도 우리 식구들 먹여 살려야 된다고 못 가게 해서 동생만 학교 공부 시키자고 그때 동생이 세 살이었어.
그래서 나는 입학을 하고 와서 개학을 해야 되는데 못 간다고 학교에 가서 퇴학을 하고 왔어. 그때만 해도 공부를 해야겠는데 하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라. 그래서 공부를 하려니까 학교는 못 가고 그때 한문 공부를 했어. 초등학교 가기 전 집에 할아버지한테서 옛날에 추구라고 그걸 한 권 배웠어. 벌로 배운 택이지 뭐.
12살, 13살 이 나이에 아버지 죽은 사람은 나 혼자였어. 죽은 사람 자식들이 거의 다 49년도에 태어났고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 모자 쓰고 배지 달고 학교 가는데 나는 지게 지고 매 끼니 동생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산에 올라야 했어.
다른 친구들은 공부 하는데 나는... 왜...
나도 공부를 해야지 싶어서 농사지을 때는 집에 와서 일 해야 하고 이래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어.
그 뒤에 공부를 하려면 어디로 가야 되나 보니 갈 데가 없어.
그래서 절로 갔어. 거기 가서 명심보감을 배우고 그 뒤에 봉이골 산골 서당에 가서 소학 대학을 배우고 이때 한문 공부를 하고 시도 짓고 배웠어.
중학통신강의로 12권 배웠어. 그때 배운 걸로 지금 위령탑 지어놓은 비문과 유족시도 지어놓은 거라.
그래도 우리 합동 유골 모신데 거기 비문을 쓰는데 곤란한 것이 군인들이 잘못했다 해야 하것나 아무 죄도 없이 일을 당했다 해야 되것나 이게 어려운기라.
잘못해놓으면 또 우리가 다칠 거 아니가. 또 그리 안하면 우리가 그게 뭐 죄를 지어서 빨갱이라서 죽었다 해야 되것나. 이걸 고심을 많이 했다고. 그 학자랑 나랑 하면서 일단 쓰기는 쓰자. 된 대로 쓰자.
그래서 내가 된 대로 불러주고 또 고치고 하면서 비문을 누가 썼다 이 시는 누가 썼다 하자니까 그걸 못 쓰게 하는 거라. 만약에 정부에서 알면 잡아들인다고 해서 그때는 이름을 못 쓰고 나도 추진한 사람을 추진 위원장으로 비에 넣어야 되는데 그것도 겁이 나는 거라.
그래도 밑에 조그맣게 라도 써넣자 해서 돌 공장에 부탁해서 세 사람 이름을 넣어놨지. 그런 속에서 묘를 만들고 비문을 써서 걸어놓고 해왔는데 내가 절에서 공부를 하면서 대학까지 읽고 해 보니까 학교 공부는 도저히 안 되는 거라.
그래서 그때 내가 한번 때려치우고 중학교 강의록으로 받아서 집에서 공부를 했어 영어도 하고. 고등학교 책은 또 달라서 그거는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일도 해야 되고.
절에서 공부를 마저 하다가 내일 아침에 우리 어머니가 생일인데 이 난리를 당하고 어머니 생일도 한번 찾아 주는 사람이 없다 싶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어머니 생일을 찾아 주것나 하고 가만히 연구를 해본 게 쌀을 한 홉 해서 한때를 먹는데 그 위를 깎아가지고 그걸 모아보니 쌀 두되 되더라고.
그걸 절에서 보재기에 넣고 함양 장에 가서 내고 그 돈을 가지고 명태를 두 마리 살려고 보니까 돈이 모자래.
그래서 한 마리만 달랑 살 수도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어서 함양에서 수동까지 걸어와서 우리 할아버지한테 갔어. 내일 아침에 어머니 생신인데 명태를 한 번 사다가 국을 끓여드리고 싶은데 이리이리 내가 쌀을 내 가지고 팔아도 돈이 모자란다 하니까 참 기특하다 하시면서 옛날 할아버지 줌치에서 돈을 내는데 팔팔 핀 십 원짜리 두 장을 주는 기라.
그 돈을 가지고 함양장을 다시 갔어. 그제야 명태 두 마리 사겠더라고. 옛날에 명태 참 귀했어. 명태 사면 짚으로 묶어주거든. 그걸 차비도 없고 차도 없으니까 또 걸어서 절에까지 와서 냉장고도 없지 고양이가 뜯어 먹을까 싶어 처마에 매어 놨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또랑에서 세수하고 부처님께 절을 오십 번씩 하고 그리고 공부를 하고 가려니까 산길이라서 무서웠어. 옛날에 거기 목매달아 죽은 나무도 있고.
글 가르치는 선생님이 니가 일진을 보고 하니까 일진을 보고 가라고 하더라고. 그때는 내가 그런 것에 좀 쏠렸었어. 일진을 보니까 별로 안 좋아. 그래서 그날 안 가고 다음날 날이 좀 훤할 때 명태 어깨에 걸치고 왔어.
도착하니까 이 방에서 어머니가 동생들 둘 앉혀놓고 서이서 밥을 먹고 앉아있는데, 어머니는 내가 올 줄 몰랐제. 그래 내가 이야기를 하면서 명태를 내놓고 우리가 한바탕 울었제.
그리고 나서 어머니가 국을 다시 끓이고 밥을 다시 또 먹었어.
그때 내가 생각하길 명심보감에 보면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니 했는데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 사람이 최곤데 내가 일진이나 보고 미신을 섬기다가 어머니 생일 시간도 못 맞췄다 이기라. 그래서 그때 내가 인생이 최곤데 미신이 무슨 필요가 있노 하고 기독교로 발을 돌리게 됐어.
또 앞산 너머에서 공부를 했는데 소학 대학 공부를 마치고 53년도 인가 그때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에는 동네 인심이 좋아서 서로 부역을 했어.
부역을 좀 나와 달라고 하면 싹 다 나왔어. 나무도 베어다 주고 나르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나이도 얼마 안 되는 기 이런 걸 짓는다고 어찌해서 그것을 했다 싶고. 그땐 기와를 올리는데 도로가 없어서 여기 못 올라오면 개평 기왓골에서 구운 걸 싣고 저 밑에 부락에 부라 놓은걸 다 주워 올렸거든. 그거 다 올려 가지고 교회 기와를 이었어. 부역으로.
한 번은 저 밑에 동네 새터 사람들한테 소리 했더만 아무도 안 나왔어. 이상해서 내려가서 물어보니 즈그는 안 믿으니까 교회 짓는다 해싸고 해서 안 갔다 하길래 사정을 얘기항께 또 잘 들어줘. 그래서 그 이튿날 부역을 해주고 해서 교회를 지었어.
야튼 이제 내가 우리 아버지 유골 찾아와야겠다 했어. 다른 사람들은 다 즈그 아버지 유골을 잘 써놓은 묘가 있고 명절에 거기 가서 절도 하고 하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 먹여 살리고 키울라꼬 고생하고 집 짓다가 그리 갔는다.
저 위에 저 집을 참 잘 지었어. 우리 아버지는 참 복도 없어. 형제간에 와 그리했는가 몰라. 큰아버지는 저 윗집에 살고 우리는 이 오막살이 돌담에 살았어. 큰집 형님 집에 일해 줌서 할아버지 계시니까.
그때 집 나무가 쌨어서 베서 벗겨먹고 그 시절은 무법이라 나무를 그냥 막 베는 게 되고 그랬거든. 그래 나무를 베서 집을 짓다가 거기 끌려가고 그리 됐는기라.
일제시대에도 큰아버지 구장 질 할 때 잡아다가 보국대 보냈어. 우리 한국 사람들을 일본으로 보국대 보내는데 자기 동생을 잡아서 보국대 보낼라고. 우리 아부지는 술 잡수시고 밖에 나가서 밤에 안 들어오시고. 그런데 동생 들어오면 잡을라고 아래채에 숨어 앉았다가 뭣도 모르고 밤에 요 집이 오막살이니까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이리 오는데 고마 재구야 카면서 기 나와 가지고 딱 붙잡아다가 지 동생을 보국대 보낸 사람이라.
나는 그것도 몰랐는데 보국대 가면 일본복 입고 증명사진을 찍는데 그게 아직도 있어 지금. 그래 잡혀가 보국대를 갔지. 그런데 오찌오찌 해가지고 가다가 증명사진까지 다 찍고 튀어서 도망 오셨어. 그렇게까지 해가지고 오셔서 나를 공부시킨 아버지야. 큰아버지가 아들 공부시켜서 선생질 하는게 얼매나 부러웠는지 아버지가 나를 선생질 시킬라고 학교 보내서 내가 초등학교 때 공부하고 있으면 학교까지 찾아와서 내가 성의있게 하는가 안하는가 그것까지 살펴보고 가고 그랬어.
그랬는데 아버지가 참 저리 되고 나서 공부도 못하고 이리 됐는데 형제간이라도 그렇게...
야튼 그래서 내가 우리 아버지 죽어도 뼈 찾아오리라 했는데 정부에서 못 하구로 하고 그래서 혼백을 불렀는기라. 밤나무를 다듬어가지고 이름을 써가지고 거기 가서 우리 어머니가 당세기에 담은 것을 머리에 이고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수동에 월명산이라고 거기 묘를 썼는데 이게 진짜 묜가 싶더라고. 그러고 어릴 때 가 봐도 뼈가 없는데 싶어 마음이 안 쓰이고 단지 저기 당그래산 밖에 안쳐다 보이는 기라. 그런데 이제 세월이 갈수록 도로가 가직게 나고 확장이 되고 막 그때만 해도 논이고 밭이고 밤나무고 이랬었는데 뭐 창고 짓고 자꾸 변해 내려오는 기라.
아이고 얼마 안 있어 갔더니 요 꺼지 밀것다 싶어서 이거 안되겠다 하고 죽을라면 죽고 잽히 가면 잽히 가고 함서 동민들을 동원시켰다 아이가. 그래서 그 사진을 보면 한 삼백 명이 모였어 참 많았어. 그때 거기 나온 사람은 거의 다 죽었어.
그래서 협동해서 서둘러 가지고 파기 시작했는데 왜 그랬냐면 내 귀에 들리길 학살한 자리에 사격장을 했다 카는 기라. 내가 그때만 해도 나이가 어려서 군청에 갔었어. 가서 죽은 것도 억울한데 왜 여따가 사격장을 해서 파서 없앴느냐 하면서 행정과에 난리를 지기니까 다시 가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오면 처리를 해주겠다 하는기라.
그때만 해도 함양읍에 자전거를 하나 빌려 타고 갔어. 저 지금 쓰레기장 했던데 고게 하고 고 옆으로 있었는데 나도 알쏭달쏭 한 거라. 그때는 쓰레기장을 안 했거든.
근데 그 자리가 학살을 많이 시켰던 데야. 그 자리가 바로 길가 옆에 고랑이라. 고랑인데 가보니까 문 앞에 한 무디기 죽여서 그래놓고, 또 그 안에 한 무디기 해놓고, 한 서너 무디기 됐어.
지금 생각하면 간도 커. 그 구디를 밟고 지나서 그 안으로 들어갔어. 그 안에 들어가니까 널찍하게 사격장을 만들어 놨어. 그래서 아, 여기는 우리 자리가 아니다 싶어 내가 본 자리가 아니다 싶었어.
산을 하나 더 넘어가니까 그 자리에 있어. 군청에 다시 와서 아니더라 하고 그때부터 동원을 시켰지. 이거 파야 된다 안 파면 안 된다.
그때만 해도 창고가 옆에까지 왔었어. 우리 파자마자 당장 확 거기까지 밀어서 집을 짓더라고.
맨날 함양 산청 카는데 국회에서도 그렇고 산청 방곡 저거를 서주 동강인가 하고 일부 들어간 거 그게 함양이라 그 다음에 전부 산청 사람이라.
그때 여수에서 난리 지기고 그 부대 사람들이 공비토벌로 지리산으로 왔다가 지리산에서 거창 신원을 감서 그 서주 골짜기로 그리 빠진 기라. 빠지면서 그 난리를 지기고 학살을 시키고 그 부대가 다시 수동으로 건네 와가지고 신원가면 또 수동이 있어. 그런데 이 수동이 그 수동인 줄 알고 달라 들어 가지고 용소막 골짝 요 밑에 마을 부락에 불을 지른기라 고마.
용소막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불을 질러놓고 군인들이 와서 그래삔 게 그때만 해도 군인들이 경찰이 뭐라 하면 아무도 대꾸도 못하고 집 타는걸 보고 있다가 군인들이 물었제. 수동이라 하니까 불을 질렀는데 뒤에 알고 보니까 함양 수동이거든. 그러니 이 사람이 놀래가지고 중단을 시켜가지고 저리 신원으로 빠지는 기라.
신원 가서 또 난리를 지기고 이래가지고 신원은 김동영 국회의원, 산청에는 권익현이 이런 사람들이 거들어서 추모기념사업을 했고. 그래놓으니 만날 함양 산청 여 온 군민이 희생당한 거는 모르고 일부 즈그 거기에 함양 다 들어있는데 와 자꾸 함양을 들먹이냐 카고 자꾸 내가 말하는 걸 신용을 안하는 기라.
와 함양도 했는데 안 했다 카냐고 그런 소리만 하고. 그래서 군 의회로 가서 한소리 했다 아이가. 산청은 다 저리 해가지고 하는데 함양은 왜 군의원들이 이 조차 모르고 있느냐 했더니 그래,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해서 산청 가서 서봉석 의원님한테 얘기를 하니까 자기가 얘기를 해준다 카데.
함양 군의원들한테 수동 내백에 강신원이 군의원 할 때 그때서야 군의원들이 서들어 가지고 함양군 전체를 조사를 항께 면에 있는 군의원이 하나씩 있었는데 조사를 하니까 함양군에 삼백 명이 나오는기라.
하룻저녁 강신원 군의원이 나르 부르더라고. 술을 한잔 쳐 먹고서는 산청 군의원한테 그런 소리를 듣게 한다고 뭐 하는기라. 느그가 할 일을 느그가 안 했으니까 그랬제 하고. 서류만 하고 즈그가 처리를 해야 될 낀데 나한테 넘겨주면 내가 오짤끼고 그거를.
그래 가꼬 그 뒤에 일을 하도 몬 하고 있었는데 노치수 라고 마산 있는 사람이 유족회 하자고 오라 캐서 갔더만 진병영 도의원 하고 할 때 마산서 만나서 하는데 우리는 도저히 안되는기라.
산청 방곡 저거만 들먹이고 그래서 서봉석 군의원 그 사람이 군의원 그때 떨어졌는데도 그런 일을 물고 나가줘서 유족도 없고 거는 희생자도 아닌데 회장을 하고 그래가지고 그때 가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물으니까는 시효가 삼 년인 거 이거를 우리는 몰랐던 거라.
서봉석 그 군위원은 시효 지나기 전에 해야 된다고 물고 늘어져서 소송을 하고 또 하고 그래가지고 세 번째까지 했더라고. 우리는 시효도 모르고 저리 해놨으니 자동적으로 되것지 하고 있었지. 근데 고마 우리는 시효가 지나고 산청은 보상을 싹 다 받았다 아이가. 우리는 대한민국 군인 경찰이 죽였는데 시효가 무어냐 하고 있었지.
우리는 국회의원 믿고 그렇게 했는데 왜 함양은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느냐 하고 함양이 참 미웠어.
그때 권익현이가 국회의원 하면서 산청 거창 사건 등으로 접수하라 할 때 저것들은 넣었어. 우리도 넣었어. 꼭 하라고 서들은 것도 윤학송이 도의원 할 적에 길을 열어주더라고.
정용규 군수할 때 했는데 서류가 많아. 서른두 명의 서류를 떼어다가 만들어 그걸 다 보따리로 하나를 만들어서 줬는데 그리 햇디만은 산청 방곡하고 거창 신원은 됐는데 우리 함양 꺼는 안되는 기라.
그래서 서류를 찾으러 갔드만은 내나 보따리 그대로 내 주는 기라. 내가 볼 때 우리가 준 그대로 군청 선반에 있다가 그대로 꺼내준 기라. 안 한기라. 아무것도.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내 복이 까장인데 내가 뭐 할 수 있나.
거창서도 사람들이 서들어서 해 재끼제, 산청 방곡도 권익현이 서들어서 해 재끼제. 함양은 누가 나서는 사람이 없어 사람이 아무도...
신성범이 국회의원 할 때 내가 따라다니면서 씨부려 싸도 들은척 만척 했제. 강석진 사무실 가서 얘기해도 그게 무슨 소리냐 하제.
산청 방곡은 그것도 모자라서 데모한다 카제. 나중에 사진을 보니까 여기 군의장하고 군의원 몇 사람하고 거기 서있어.
아 어찌나 부아가 나던지. 그래 내가 가서 함양은 삼백 몇 명이 있는데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째서 거기 가서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냐고 내가 머라 캤지. 그랬드만 오라 캐서 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카는 기라.
참 딱하다. 오라 캐서 갔다고 군의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가, 오데 부역하러 댕기는 사람들인가. 참 내... 글카고 말았어.
그래 지금 생각하면 꼭 나도 죽을 때가 되니까 고생한 게 참 원통하고. 동생이 둘 죽었는데 고마 아버지 바로 일 당하고 나서 쪼꼬한한기 태어나서 홍역으로 죽었어.
그때는 홍역들은 지역에 땅을 못 파게 하는 거라. 그래서 죽은 아들을 망태에 넣어서 나무에 매달아놓고 했는데 그리하기 싫어서 여기서 밤12시 넘어 가라 캐서 어머니가 업고 나는 뒤에서 괭이 들고 이 뒷산 한 20리 될까 하는 산을 넘어서 산모리에 돌아서 묻고 왔다 아입니까.
어머니는 12시 넘어서 가니까 내가 무서울까 싶어 나를 앞에 세웠다가 앞에 세우면 또 무서울까 싶어 뒤로 세웠다가 하시던 그런 게 자꾸 생각이 나.
인생 어찌 살아왔는가 싶고 합동묘 해놓은 것도 별거 아닌가 싶다가 또 대단하다 싶다가 그래.
합동묘지 조성에 유족찬조 모금한 것이 1,512만원 있었어. 합동묘지에 1,200만원 쓰고 나머지는 경비로 사용되고. 위령탑이라도 세우고 하니까 마음이 조금 풀어진다고 할까. 돌아가신 분들 자녀들은 다 돌아가시고 이제 남은 건 손자 손녀들만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