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현 유족 구술
- 작성일
- 2025-08-19 16:13:05
- 조회수 :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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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현 유족 구술
그때 내가 네 살 때 일이에요. 나는 형제도 없어 외동아들이에요.
그 당시 나는 어려서 어머님 얘기를 들어서 알아요.
아침에 대창을 가지고 지곡 지서로 오라고 하더래요, 훈련받으러. 모이라고 해서 갔는데 그날 안 올라오시더래요.
그날 지서에 있다가 차 타고 훈련받으러 가는 것처럼 해서 복골로 데려 간거야. 석복 사람들이 보니까 사람을 묶어서 가더래요. 냇물을 건너게 해서 건넜더니 이미 구덩이를 크게 파놨고 거기 쭉 세워서 총으로 쏴 죽인 거예요. 거기 동네사람들이 봤대요.
지곡 개평마을에서 여럿이 갔는데 나는 몇 명이 가신건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만 가셔서 못 온 거만 알지 누가 몇 명이 갔는지는 몰라요. 훈련 받으러 오라고 한 사람은 경찰이 아니고 동네 구장이었대요.
그런데 훈련받으러 간 아버지가 안 오시니까 어머니가 백연리 계시는 집안 아저씨과 같이 지서에 찾으러 갔는데 없다 카더래. 거기서 아버지 신발 한 짝이랑 허리끈을 보셨다네요.
지서에서는 여기 없다고 복골로 갔다고 하니까 아저씨랑 복골에 가신 거죠. 가니까 막 이 사람 저 사람 얽혀있고 피 칠갑이 되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더래요. 우리 어머니가 맨날 아버지 옷을 챙겨 주니까 띠 같은 거나 옷 입은 거 보고 찾았다고 해요. 집안 아저씨가 욕봤지. 아저씨가 삽다리 그거 가지고 아버지를 싸서 오시다가 여기까지 못 오시고 두재고개에 집안 선산이라고 거기 그냥 묘를 쓰셨대요.
126 │ 함양양민희생자구술집
무덤을 좋은데로 옮기려고 해도 우리한테 해롭다고 손도 못 대게 해서 묵은 묘처럼 해 뒀어요. 나는 아버지 묘를 멋지게 해 드릴라고 했는데...
지서에 가서 경찰차를 타고 거기를 가서 그리 됐으니 이유도 모르고 훈련 받으러 안 오면 안 왔다고 또 뭐라 하고 사람을 잡아다 고생시킬까봐 훈련을 하러 갔지요.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영리하지가 못하고 순진하니까 시키는 대로 했지. 오라하면 그냥 아침 먹고 간 거지요. 훈련받으러 간거야.
아침에 거기 안계셨으면 안돌아 가셨을 텐데...
구장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전체적인 이야기는 모르겠고 나는 우리 집 이야기만 들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구장한테 왜 데리고 갔나 무슨 일이냐 묻고 따지고 할 상황이 되지도 못했어요. 아무도 그럴 사람도 없었고. 그 분이 살아 계셨는데 뒤에 물어보고 싶어도 오래 전 일이라 묻지도 못하겠더라, 그러고 세월이 흘렀지.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닐 때니 나는 너무 어렸고 어머님한테 전해 듣기만 한 일이라요. 어머님이 18세에 시집 오셔서 사건 당시에 20대셨어요.
한 집에 큰집 작은집이 같이 살았는데 큰 아버님도 나가서 못 돌아오셨어요. 그 당시 지서까지는 같이 가셨는데 복골에서 시신을 못 찾아서 그냥 행방불명 상태에요. 복골로 같이 가신게 아닌지 어찌 된건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
할아버지가 아들 넷이 있었는데 그 중 한분은 우리 아버지였는데 돌아가셨고, 한분은 시신을 못 찾아서 행방불명되고 어린 아들 둘은 훈련받을 나이가 안 돼 안 갔으니 사셨어요. 안가도 고만인 것을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니 따라갔다 그리 되신거지요.
경찰이 왜 민간인을 끌고 가서 죽였는지 억울해 죽겠어요. 그 당시에는 이장이 도장 주라 하면 주고 할 때라서 내가 보도연맹인지 뭔지도 모르고 간 사람이 수두룩할 꺼예요. 항의 하거나 따지고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50년 음력 6월12일 쯤으로 그냥 제사만 지내고 있지요.
그래가지고 내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야. 내 나이가 칠십여섯이야. 네 살 때 그랬으니 벌써 72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어.
사진도 한 장 없어요. 사진이 있었는데 6.25에 다 타버리고 그냥 나랑 꼭 닮으셨다는 이야기만 들어서 알아요. 사진이 한 장만 있었어도 얼마나 좋을까...
내 평생에 그렇게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산 게 너무 억울해서 내가 맨날 그런 생각을 해요.
옛날에 본 사람들 얼굴이 영화에서처럼 눈감으면 얼굴이 나오는 그런 카메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만 하면 얼굴이 탁 나오는 그런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얼굴을 기억하면 그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님은 어릴 때 그리 되셔서 본처가 있는 집에 작은 처로 개가 하셨어요. 처음에 나는 안의 황대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따라가서 살았는데 학교가 너무 멀었어.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고 중간에서 놀고 한기라. 그래서 함양에 어머니 있는 곳으로 와서 살게 됐어요.
우리 어머니가 여관을 하셨어. 거기서 일 좀 하다가 집안에 아는 분이랑 서울에 가서 한 삼년 살았어요. 그때 김신조가 내려오잖아요. 그 시기에 내가 서울에 있었거든. 어머니가 전화가 오기를 거기 있으면 죽으니까, 넌 죽으면 안된다고 내려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함양으로 다시 피난을 내려온 거예요. 그 후에 이모 댁에서 지금 하는 수산업 관련 일을 시작했어요.
아이고 이 사는 거 이야기 할려면 끝이 없지요. 누가 있나 뭐가 있나 살려고 고생 참 많이 했어요. 나 먹고 살기 바쁘고 누가 얘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니 자식들이 더 애틋해서 해주고 싶은 게 많았어요.
외롭게 살고 자식들 공부 시킬라고 고생하고 해도 자식들 다 공부시켜놓고 하니 뿌듯해요. 남한테 손 하나 벌리지 않고 혼자 일궜어.
그때 내가 네 살 때 일이에요. 나는 형제도 없어 외동아들이에요.
그 당시 나는 어려서 어머님 얘기를 들어서 알아요.
아침에 대창을 가지고 지곡 지서로 오라고 하더래요, 훈련받으러. 모이라고 해서 갔는데 그날 안 올라오시더래요.
그날 지서에 있다가 차 타고 훈련받으러 가는 것처럼 해서 복골로 데려 간거야. 석복 사람들이 보니까 사람을 묶어서 가더래요. 냇물을 건너게 해서 건넜더니 이미 구덩이를 크게 파놨고 거기 쭉 세워서 총으로 쏴 죽인 거예요. 거기 동네사람들이 봤대요.
지곡 개평마을에서 여럿이 갔는데 나는 몇 명이 가신건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만 가셔서 못 온 거만 알지 누가 몇 명이 갔는지는 몰라요. 훈련 받으러 오라고 한 사람은 경찰이 아니고 동네 구장이었대요.
그런데 훈련받으러 간 아버지가 안 오시니까 어머니가 백연리 계시는 집안 아저씨과 같이 지서에 찾으러 갔는데 없다 카더래. 거기서 아버지 신발 한 짝이랑 허리끈을 보셨다네요.
지서에서는 여기 없다고 복골로 갔다고 하니까 아저씨랑 복골에 가신 거죠. 가니까 막 이 사람 저 사람 얽혀있고 피 칠갑이 되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더래요. 우리 어머니가 맨날 아버지 옷을 챙겨 주니까 띠 같은 거나 옷 입은 거 보고 찾았다고 해요. 집안 아저씨가 욕봤지. 아저씨가 삽다리 그거 가지고 아버지를 싸서 오시다가 여기까지 못 오시고 두재고개에 집안 선산이라고 거기 그냥 묘를 쓰셨대요.
126 │ 함양양민희생자구술집
무덤을 좋은데로 옮기려고 해도 우리한테 해롭다고 손도 못 대게 해서 묵은 묘처럼 해 뒀어요. 나는 아버지 묘를 멋지게 해 드릴라고 했는데...
지서에 가서 경찰차를 타고 거기를 가서 그리 됐으니 이유도 모르고 훈련 받으러 안 오면 안 왔다고 또 뭐라 하고 사람을 잡아다 고생시킬까봐 훈련을 하러 갔지요.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영리하지가 못하고 순진하니까 시키는 대로 했지. 오라하면 그냥 아침 먹고 간 거지요. 훈련받으러 간거야.
아침에 거기 안계셨으면 안돌아 가셨을 텐데...
구장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전체적인 이야기는 모르겠고 나는 우리 집 이야기만 들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구장한테 왜 데리고 갔나 무슨 일이냐 묻고 따지고 할 상황이 되지도 못했어요. 아무도 그럴 사람도 없었고. 그 분이 살아 계셨는데 뒤에 물어보고 싶어도 오래 전 일이라 묻지도 못하겠더라, 그러고 세월이 흘렀지.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닐 때니 나는 너무 어렸고 어머님한테 전해 듣기만 한 일이라요. 어머님이 18세에 시집 오셔서 사건 당시에 20대셨어요.
한 집에 큰집 작은집이 같이 살았는데 큰 아버님도 나가서 못 돌아오셨어요. 그 당시 지서까지는 같이 가셨는데 복골에서 시신을 못 찾아서 그냥 행방불명 상태에요. 복골로 같이 가신게 아닌지 어찌 된건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
할아버지가 아들 넷이 있었는데 그 중 한분은 우리 아버지였는데 돌아가셨고, 한분은 시신을 못 찾아서 행방불명되고 어린 아들 둘은 훈련받을 나이가 안 돼 안 갔으니 사셨어요. 안가도 고만인 것을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니 따라갔다 그리 되신거지요.
경찰이 왜 민간인을 끌고 가서 죽였는지 억울해 죽겠어요. 그 당시에는 이장이 도장 주라 하면 주고 할 때라서 내가 보도연맹인지 뭔지도 모르고 간 사람이 수두룩할 꺼예요. 항의 하거나 따지고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50년 음력 6월12일 쯤으로 그냥 제사만 지내고 있지요.
그래가지고 내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야. 내 나이가 칠십여섯이야. 네 살 때 그랬으니 벌써 72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어.
사진도 한 장 없어요. 사진이 있었는데 6.25에 다 타버리고 그냥 나랑 꼭 닮으셨다는 이야기만 들어서 알아요. 사진이 한 장만 있었어도 얼마나 좋을까...
내 평생에 그렇게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산 게 너무 억울해서 내가 맨날 그런 생각을 해요.
옛날에 본 사람들 얼굴이 영화에서처럼 눈감으면 얼굴이 나오는 그런 카메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만 하면 얼굴이 탁 나오는 그런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얼굴을 기억하면 그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님은 어릴 때 그리 되셔서 본처가 있는 집에 작은 처로 개가 하셨어요. 처음에 나는 안의 황대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따라가서 살았는데 학교가 너무 멀었어.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고 중간에서 놀고 한기라. 그래서 함양에 어머니 있는 곳으로 와서 살게 됐어요.
우리 어머니가 여관을 하셨어. 거기서 일 좀 하다가 집안에 아는 분이랑 서울에 가서 한 삼년 살았어요. 그때 김신조가 내려오잖아요. 그 시기에 내가 서울에 있었거든. 어머니가 전화가 오기를 거기 있으면 죽으니까, 넌 죽으면 안된다고 내려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함양으로 다시 피난을 내려온 거예요. 그 후에 이모 댁에서 지금 하는 수산업 관련 일을 시작했어요.
아이고 이 사는 거 이야기 할려면 끝이 없지요. 누가 있나 뭐가 있나 살려고 고생 참 많이 했어요. 나 먹고 살기 바쁘고 누가 얘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니 자식들이 더 애틋해서 해주고 싶은 게 많았어요.
외롭게 살고 자식들 공부 시킬라고 고생하고 해도 자식들 다 공부시켜놓고 하니 뿌듯해요. 남한테 손 하나 벌리지 않고 혼자 일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