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자 인터뷰

임채길 유족 구술

작성일
2025-08-19 1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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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에 저희 아버지는 일본에 계시다가 저희 할아버지와 함께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셔서 치라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도 있었고 해서 아마 그때 군수용품이 많이 필요해서 노동일을 하신 게 아닌가 그리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희 할머니께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는 할머니가 두 분 계셨습니다.
본래 우리를 낳은 할머니는 치라골 고향에 계셨고 우리를 길러주신 할머니는 일본에서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서 오셨는데 그 할머니가 말씀해 주시기를 큰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에 아마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1949년 음력 7월27일 새벽에 어스름히 해가 뜰 때 경찰하고 경찰특공대원들이 와서 총을 탕탕탕 하고 쏘더래요.
놀래서 바깥으로 나가봤더니 나지막한 동네 앞터로 경찰들이 쫙 서있고 동네 오른쪽 높은 산 쪽으로도 경찰들이 다 서서 있으면서 경찰하고 특공대들이 합동으로 집집마다 수색을 하더랍니다.
부락민들이 감히 그 경찰들이랑 경찰특공대원들이 총 칼을 들고 설치는데 어디로 피해서 도망을 갈 여건도 못됐었고 우리 할머니 말씀으로 그 당시 따발선이라는 게 있었대요.
통신시설 할 때 그 안에 철사하고 구리선 하고 이렇게 섞여있고 바깥은 피복이 되어있는 그 선으로 사람들을 뒤로 다 엮었대요.
집집마다 한분씩을 다 잡아갔는데 어떤 집은 돈벌이 때문에 집에 남자가 없으니까 그 부인을 잡아갔대요. 그래가지고 그 부인도 총살을 당하셨대요.
18명이 잡혀가서 17명이 돌아가시고 임기택 씨 한분만 살아오셨대요.
이 이야기를 들은 후에 제가 어른들께 많이 듣기도 했고 그때 살아 돌아오신 임기택 씨가 저희 집에도 오셔서 가끔 이야기 하고 놀다가 가셨는데 항상 저를 불쌍하다고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길아~ 너는 커서 아버지 원수를 꼭 갚아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셔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희 아버님은 스물여덟쯤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님은 스물여섯 쯤에 혼자되셔서 남편 없이 혼자 가정을 꾸리시기 힘드셔서 다른 곳으로 개가를 하셨어요.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서 경제력도 없는데 거기서 사시기 힘드셨을 테고 또 젊고 하셨으니 개가를 해서 사시다가 올해 2022년 5월2일에 돌아가셨어요.
개가를 하실 때 저는 데리고 가셨는데 저희 형님을 혼자 놔두고 오신 게 한이 맺히셨던 거 같아요.
제 위로 여덟 살 차이나는 형님이 한분 계셨는데 고생고생 하시며 농사를 짓고 사시다가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일찍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형수님과 조카들은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항상 자식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열심히 잘 살아라 하는 말씀, 어떤 그런 부분도 있었고 또 어머님이 정말 정직하게 거짓말 하지 말고 살아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알아줄 것이다 착하게 살아라 이런 말씀을 참 많이 해주셨어요.
그게 제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저희 어머님이 저를 임신하신지 3개월 돼서 아버지가 잡혀서 돌아가셨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 세 살 때 어머님 개가 하신 곳에 따라가서 살다가 열 네 살에 다시 본가로 돌아왔어요.
그때 본가로 돌아와서 마을 분들께 이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되었죠.
제 아버지 또래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이러니까 제 또래 되는 애들이 마을에 별로 없었어요.
내 또래가 넷이 있었는데 한명은 일찍 세상을 뜨고 나머지는 도시로 나가고 그랬어요.
한 마을에서 18명을 잡아갔으니 한집에 무조건 한명씩 잡아갔어요. 그 부인은 남편이 없으니 대신 잡아 간거지요.
아버지가 잡혀가고 할아버지가 황소 두 마리 값을 들고 경찰서에 구하러 가니까 이미 당그래산으로 가고 없더래요.
그래서 우리가 제사를 칠월 스무여드레 날 지냅니다.
그 이후에 저는 시간만 있으면 책을 좀 봅니다.
옛날 전쟁관련 것이라든지 또는 양민학살이라든지 이런 걸 조금씩 사서 봅니다.
근데 보면 볼수록 정말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같으면 재판도 하고 또 거기에서 사형까지 가려면 1심 2심 3심을 가고 대법원을 가고 무죄 증명되면 석방하고 하는데 그때는 잡아가서 다음날 다 죽여 버렸으니...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난리통이 나고 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용수막이라고 하는 그 아랫동네로 전부다 대피를 시켰어요.
옛날에는 소개라고 했어요.
소개 시키고 나서 마을에 불을 질렀대요.
그래서 살아가기가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나 봐요.
저는 그렇게 소개를 시켜놓고 나서 용수막에 남의 집 아랫방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마을 사람들을 다 밑으로 내려가게 해놓으니 그 동네의 아래채나 이런데서 살기도 하고 일부 사람들은 치라골이 싫다고 뿔뿔이 흩어진 사람도 있고 그랬죠.
저는 누구의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5년여에 걸쳐서 그 분들이나 친지 자식 분들이 치라골에 오시면 제가 꼭 연락처를 달라고 하고 해서 관련된 분들 주소를 모았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친척이 있다는 마을로 직접 찾아가서 돌아가신 유족 분들을 직접 만나서 유족회를 결성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가 사상범으로 몰려서 재판도 못 받고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아무것도 안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는데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서 못한다는 분들도 계시고 연좌제 다 폐지되고 했으니 그냥 놔두고 살자 하시는 분도 계시고 협조를 안 하시려는 분들이 계셔서 치라골 유족회 만드는 일에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힘들었습니다.
여순사건 이후에 진압부대가 와서 진압을 하려고 하니까 지리산 이쪽으로 다 숨어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이쪽으로 피해 와서 지역민들이랑 유대관계가 될 수 있는 사돈에 팔촌까지 다 연을 대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이 많잖아요.
외갓집 육촌이다 팔촌이다 십촌이다 그러면 쌀 한주먹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막 다 떨어져서 무릎이 쑥 나온 옷을 입고 한겨울에 신도 못 신어서 짚신에 천을 싸서 그러고 돌아다녔답니다.
그런 꼴을 해가지고 집에 들어오면 안도와줄 사람이 있겠나요.
아무리 철천지원수 지간 아니고서야 다 도와주지요.
그러니까 그걸 부역했다고 하면 부역한 게 사실이에요.
그리고 동네 간에 시기도 좀 있었을 거예요.
힘센 사람이 있는 동네는 무시하지를 못하고 겁을 내니까 그런 것들도 있고 부잣집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도 있고 하니까 서로 밀고도 하고 그랬나보더라고요.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보다 우월하다 싶으면 시기도 좀 하고 그런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때 조금만 더 알아보고 공부를 했으면 그렇게 돌아가신 분들 명예회복은 하고 유족들 보상도 좀 받고 했을 껀데 먹고 살기 급급해서 명예회복만 해놓으면 언제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되겠지 했는데 시효라는 게 다 지났더라고요.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봐도 패전국이고 승전국이고 후진국이고 선진국이고 그 어떤 나라도 자기 국민들을 이렇게나 괴롭혀 놓고 그 여한이 대대로 흐르게 놔두는 역사는 없더라고요.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유족들의 여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네들 편의에 의해서 국민들이 희생되고 국가 내부의 공권력으로 이렇게 양민들을 학살 했으면 이 사건들을 지금까지 끌고 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국가가 사과를 하고 수습을 해서 유족들 여한을 풀어주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