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숙 유족 구술
- 작성일
- 2025-08-19 16: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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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유족 구술
우리 아버지가 서상에서 공의라고 의사 일을 하고 계셨어요.
내가 외동딸이라서 아버지가 부자고 의사고 하셔서 옷도 서울 가서 사다주시고 중학교에 여학생 겨우 15명 갔는데 다들 게다 신고 고무신 신고 다닐 때 나는 구두신고 운동화 신고 교복도 서울서 모직으로 해다 입혀주시고 생과자에 밀감 바나나도 맛보며 남들 못하고 좋은 건 다 하면서 살았어요.
중학교 다니면서 친구들이 고등학교 대학 갈 사람은 너 뿐이다고 그리 말했는데 중학교만 졸업했지. 아버지 죽고 나서 할머니랑 둘이 살았는데 굶지는 안했어도 돈이 없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중학교도 그만둘 뻔 한 거 은사님이 학비를 내주셔서 내가 수를 놓는 재주가 좀 있어서 그런 걸로 돈 벌어가면서 겨우 중학교 졸업만 했어요.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냐면 그때 인민군이 육십령 잿날망으로 내려와서 서상에 읍사무소 직원들 경찰관들은 싹 다 피난을 가고 서하 파출소까지 인민군이 다 접수를 하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나는 피난을 못 간다”고 “우리 어머님이랑 마누라는 괜찮지만 내가 딸이 하나 있는데 우리 딸을 두고 못 간다”고 “우리 딸 죽으면 안 된다”고 했대요. 아버지가 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 하고 장로님 하고 두 분을 모시고 산으로 함양에 재를 넘어오다가 서하에 우리 아버지 외삼촌 사돈네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혼자 계셨으면 안갔을 껀데 두 분을 모시고 가니까 아침에 배가 너무 고프다고 해서 밥을 좀 해달라고 해서 먹고 밥 두덩어리 얻어서 다시 올라가는데 옛날에는 전쟁 때 머슴하고 못살던 사람들이 싹다 인민군한테 붙어먹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 마을에 어떤 한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가 서하 파출소에 인민군한테 넘겨줘버렸어요. 이 사람 경찰관들이랑 공무원들이랑 막 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잡아다 줘서 우리 아버지를 그 자리에서 총살을 시켜버렸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인민군들이 서하까지 내려왔으니 내려가면서 자꾸 환자가 생기고 부상자가 생기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이남에는 의사도 없냐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 옆에 사람이 당신들이 방금 죽인 사람이 의사라고 하니까 인민군이 우리는 의사가 필요한데 의사를 죽게 만들었다고 우리 아버지 잡아다 준 사람을 죽여 버릴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도망을 갔어요.
그때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나를 우리 아버지가 공주처럼 키워주셨어요. 어머니 마누라도 있는데 내가 꿈을 꾸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재산도 있고 의사고 멋쟁이라요. 멋진 양복을 입고 부채를 부치시면서 돌아가신 자리에 앉아 계셔서 “아버지 왜 거기에 앉아계셔요?”하고 물었더니 여기 참 시원하고 좋아서 앉았다. 그러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나한테 선몽을 하신 거죠.
그런데 그날 오후에 서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나를 찾아왔는지 이만 저만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전쟁통이라 어찌하지 못하고 시신을 그냥 가마니로 둘둘 말아서 냇물 가에 바로 묻어놨다고 했어요.
같이 갔던 교회 분들은 아버지가 산에 안 올라오시고 총소리가 나니까 그 길로 서하 집으로 올라가서 사셨어요. 교회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다 초상을 치러 준거지요.
몇 십 년이 지나서야 우리가 함양으로 이장을 했어요. 내가 그 후에 읍사무소에 가서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날을 똑똑히 알아보려고 갔는데 이장 한 날짜로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외동딸이라서 아들 낳으려고 서모가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행정절차 땜에 그리 해놓으신 모양이에요.
서하 교회 가서 알아 볼라고 하니까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그 일이 일어난 때를 똑똑히 기억하시는 분이 없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6월25일 전쟁이 났으니 아마 전쟁 나고 얼마 안 됐으니 6월 말이나 7월 초에 돌아가셨을 것 같은데... 아버지 돌아가신 날을 똑똑히 몰라요.
아버지 묘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산으로 해서 먼데서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자리를 먼발치에서 봤어. 혹시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서 실묘 될까봐 교회 사람들이 이장을 해라, 그래서 함양으로 이장을 하면서 그 날짜로 사망신고가 된 거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이 맺혀 살아요.
그때 함양에 이런 사람들을 조사하니까 많더라고요.
노무현 대통령 때인가, 이런 거 조사를 해서 서울서 차를 보냈는데 여기 함양 사람들 두 차에 다 싣고 김구선생님 기념관에 내려줬는데 안팎으로 텔레비를 엄청 거창하게 달아놓고 유족들 위로 해준다고 무당이 귀신 승천하는 굿을 하고 점심 먹여서 보내주더라고요. 그걸로 끝이었어요.
우리아버지 외삼촌이 면장을 하고 이종이 읍사무소 직원을 하고 그랬는데 결혼하고 애기 놓고 한 이삼십년 지나고 나니 나한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 보상을 해준다하니 도장만 가지고 오너라”하는데 나는 싫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게 뭐라고, 아버지 목숨 돈을 내가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나는 자랄 때 너무 호강시럽게 컸어요. 너무 잘 컸어요. 읍사무소 직원들 피난갈 때 따라갔으면 됐을 것인데, 함양에 딸을 데려가야 한다면서 꼭 안가더라 케요. 의사라고 했으면 인민군이 안 죽였을 것인데. 나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걸로 돈 받는 게 너무 싫어서 안했어요. 그 돈 받아서 뭐해요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내가 아버지 목숨 값을 받아서 뭐해요.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아버지 그렇게 만든 그 사람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 일 이후에 40년 정도 지났을 때 우리 아버지 데려다가 죽인 사람이 “그 의사한테 귀한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그 딸한테 사죄를 하고 그 딸의 평생의 한을 풀어주고 죽어야 된다”고 하면서 함양경찰서에 자수를 하러 왔더래요.
자수하러 오고 한 이틀쯤 지나서 내가 큰길을 지나가니까 함양 경찰서 순경이 아버지 죽인 사람이 자수하러 왔는데 왜 안 오셨냐고 묻길래 나는 모르는 일이었어요.
알고 보니 우리 남편이 자기가 사위라고 가서 몇 십 년이 지난일인데 일없다고 그 사람을 그냥 보내버렸대요. 남편이 그 사람을 나를 못 만나게 해놔서 나는 몰랐어요. 이틀 뒤에 경찰한테 우연히 지나가다 들어서 알게 된 거지요. 나를 만나러 와서 나한테 사죄를 한다는 사람을 그냥 자기가 돌려보내서 내가 아직도 마음에 상처가 커요.
그 사람은 시효가 지나서 벌을 줄 수도 없지만 우리 남편이 아이고~ 시간 많이 지나서 뭐 이제 볼 거 없다고 그냥 돌려보낸 게 너무 화가 나서 내가 그 사람한테 이제 한이 맺힌 게 아니고 우리 남편한테 한이 맺혀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서상에서 공의라고 의사 일을 하고 계셨어요.
내가 외동딸이라서 아버지가 부자고 의사고 하셔서 옷도 서울 가서 사다주시고 중학교에 여학생 겨우 15명 갔는데 다들 게다 신고 고무신 신고 다닐 때 나는 구두신고 운동화 신고 교복도 서울서 모직으로 해다 입혀주시고 생과자에 밀감 바나나도 맛보며 남들 못하고 좋은 건 다 하면서 살았어요.
중학교 다니면서 친구들이 고등학교 대학 갈 사람은 너 뿐이다고 그리 말했는데 중학교만 졸업했지. 아버지 죽고 나서 할머니랑 둘이 살았는데 굶지는 안했어도 돈이 없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중학교도 그만둘 뻔 한 거 은사님이 학비를 내주셔서 내가 수를 놓는 재주가 좀 있어서 그런 걸로 돈 벌어가면서 겨우 중학교 졸업만 했어요.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냐면 그때 인민군이 육십령 잿날망으로 내려와서 서상에 읍사무소 직원들 경찰관들은 싹 다 피난을 가고 서하 파출소까지 인민군이 다 접수를 하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나는 피난을 못 간다”고 “우리 어머님이랑 마누라는 괜찮지만 내가 딸이 하나 있는데 우리 딸을 두고 못 간다”고 “우리 딸 죽으면 안 된다”고 했대요. 아버지가 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 하고 장로님 하고 두 분을 모시고 산으로 함양에 재를 넘어오다가 서하에 우리 아버지 외삼촌 사돈네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혼자 계셨으면 안갔을 껀데 두 분을 모시고 가니까 아침에 배가 너무 고프다고 해서 밥을 좀 해달라고 해서 먹고 밥 두덩어리 얻어서 다시 올라가는데 옛날에는 전쟁 때 머슴하고 못살던 사람들이 싹다 인민군한테 붙어먹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 마을에 어떤 한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가 서하 파출소에 인민군한테 넘겨줘버렸어요. 이 사람 경찰관들이랑 공무원들이랑 막 친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잡아다 줘서 우리 아버지를 그 자리에서 총살을 시켜버렸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인민군들이 서하까지 내려왔으니 내려가면서 자꾸 환자가 생기고 부상자가 생기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이남에는 의사도 없냐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 옆에 사람이 당신들이 방금 죽인 사람이 의사라고 하니까 인민군이 우리는 의사가 필요한데 의사를 죽게 만들었다고 우리 아버지 잡아다 준 사람을 죽여 버릴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도망을 갔어요.
그때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나를 우리 아버지가 공주처럼 키워주셨어요. 어머니 마누라도 있는데 내가 꿈을 꾸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재산도 있고 의사고 멋쟁이라요. 멋진 양복을 입고 부채를 부치시면서 돌아가신 자리에 앉아 계셔서 “아버지 왜 거기에 앉아계셔요?”하고 물었더니 여기 참 시원하고 좋아서 앉았다. 그러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 나한테 선몽을 하신 거죠.
그런데 그날 오후에 서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나를 찾아왔는지 이만 저만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전쟁통이라 어찌하지 못하고 시신을 그냥 가마니로 둘둘 말아서 냇물 가에 바로 묻어놨다고 했어요.
같이 갔던 교회 분들은 아버지가 산에 안 올라오시고 총소리가 나니까 그 길로 서하 집으로 올라가서 사셨어요. 교회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다 초상을 치러 준거지요.
몇 십 년이 지나서야 우리가 함양으로 이장을 했어요. 내가 그 후에 읍사무소에 가서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날을 똑똑히 알아보려고 갔는데 이장 한 날짜로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때는 내가 외동딸이라서 아들 낳으려고 서모가 한분 계셨는데 그 분이 행정절차 땜에 그리 해놓으신 모양이에요.
서하 교회 가서 알아 볼라고 하니까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그 일이 일어난 때를 똑똑히 기억하시는 분이 없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6월25일 전쟁이 났으니 아마 전쟁 나고 얼마 안 됐으니 6월 말이나 7월 초에 돌아가셨을 것 같은데... 아버지 돌아가신 날을 똑똑히 몰라요.
아버지 묘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산으로 해서 먼데서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자리를 먼발치에서 봤어. 혹시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서 실묘 될까봐 교회 사람들이 이장을 해라, 그래서 함양으로 이장을 하면서 그 날짜로 사망신고가 된 거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이 맺혀 살아요.
그때 함양에 이런 사람들을 조사하니까 많더라고요.
노무현 대통령 때인가, 이런 거 조사를 해서 서울서 차를 보냈는데 여기 함양 사람들 두 차에 다 싣고 김구선생님 기념관에 내려줬는데 안팎으로 텔레비를 엄청 거창하게 달아놓고 유족들 위로 해준다고 무당이 귀신 승천하는 굿을 하고 점심 먹여서 보내주더라고요. 그걸로 끝이었어요.
우리아버지 외삼촌이 면장을 하고 이종이 읍사무소 직원을 하고 그랬는데 결혼하고 애기 놓고 한 이삼십년 지나고 나니 나한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 보상을 해준다하니 도장만 가지고 오너라”하는데 나는 싫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게 뭐라고, 아버지 목숨 돈을 내가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나는 자랄 때 너무 호강시럽게 컸어요. 너무 잘 컸어요. 읍사무소 직원들 피난갈 때 따라갔으면 됐을 것인데, 함양에 딸을 데려가야 한다면서 꼭 안가더라 케요. 의사라고 했으면 인민군이 안 죽였을 것인데. 나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걸로 돈 받는 게 너무 싫어서 안했어요. 그 돈 받아서 뭐해요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내가 아버지 목숨 값을 받아서 뭐해요.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아버지 그렇게 만든 그 사람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 일 이후에 40년 정도 지났을 때 우리 아버지 데려다가 죽인 사람이 “그 의사한테 귀한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그 딸한테 사죄를 하고 그 딸의 평생의 한을 풀어주고 죽어야 된다”고 하면서 함양경찰서에 자수를 하러 왔더래요.
자수하러 오고 한 이틀쯤 지나서 내가 큰길을 지나가니까 함양 경찰서 순경이 아버지 죽인 사람이 자수하러 왔는데 왜 안 오셨냐고 묻길래 나는 모르는 일이었어요.
알고 보니 우리 남편이 자기가 사위라고 가서 몇 십 년이 지난일인데 일없다고 그 사람을 그냥 보내버렸대요. 남편이 그 사람을 나를 못 만나게 해놔서 나는 몰랐어요. 이틀 뒤에 경찰한테 우연히 지나가다 들어서 알게 된 거지요. 나를 만나러 와서 나한테 사죄를 한다는 사람을 그냥 자기가 돌려보내서 내가 아직도 마음에 상처가 커요.
그 사람은 시효가 지나서 벌을 줄 수도 없지만 우리 남편이 아이고~ 시간 많이 지나서 뭐 이제 볼 거 없다고 그냥 돌려보낸 게 너무 화가 나서 내가 그 사람한테 이제 한이 맺힌 게 아니고 우리 남편한테 한이 맺혀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