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자 인터뷰

차정호 유족 구술

작성일
2025-08-19 16: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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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에 위령탑을 세워서 73년 만에 아버지 이름을 불러봤어. 감개무량해.
나는 유복자라서 그 일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어머니가 그런 상황을 다 아시니까 나한테 이것저것 다 이야기를 잘 해주셨어.
유복자라서 누나만 하나 있는 귀한 아들이니까.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돌아가셨지만 삼촌이 아버지의 한을 갚기 위해 이북으로 끌려 올라갔어요. 행방불명이지요. 한때는 연좌제 걸렸는데(아들 유학갈 때 알았지) 폐지가 돼서 이제는 괜찮지요. 삼촌도 진실규명위원회에서 풀렸어요. 차태천이요. 나는 몰랐는데 여기 마을 어른들 말로는 겁나게 똑똑했다케요. 그 당시 공부도 많이 했고. 할아버지가 학자셨거든.
보도연맹이라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고 부락에 똑똑한 사람들을 나라에서 지정을 해가지고 이승만이 전부 보도연맹을 가입 시킨거라. 국가에서 하라고 해서 했다는데 반장이 시킨 게 아니고 중앙지침이 내려와 가입했지, 가입하는 이유도 모르는 기고. 그래서 강제 가입을 하게 됐는데 그런 걸 만들었으면 나라가 잘 이용을 해야지 어느 날 갑자기 이북으로 내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다 죽이라고 지령이 내려 왔나봐. 나라에서 단체를 만들어서 가입하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가입해서 죽은거라. 참 억울하제.
우리 동네에 똑똑한 사람이 네 사람 있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한 4명이야. 그 중 한 사람 김병현씨는 미리 그런 내용을 알고 산중으로 숨었고 살았어. 세분은 돌아가셨어. 부산으로 간 김재윤씨 형인 김재섭씨하고 홍종순씨 시아버지 임종석씨하고 아버지 하고 셋은 사망했고.
이 동네 말고도 당그래산에 한날 한시에 다 잡아다 보도연맹 희생자가 36명인가 아마 그렇지요. 마을마다 제사가 한날 한시였다 해요. 장에 가면.
우리 아버지는 담도 크고 하셔서 나는 아무 죄가 없다 하시고 끌려가셨어.
그래서 함양 경찰서에 잡혀 계시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학자에 똑똑하시니까 어쩌면 돈으로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돈을 한 뭉텡이를 들고 함양 경찰서에 가서 내가 이 돈을 줄 테니까 우리 아들을 빼줘라 하신 거라.
그런데 돈은 돈대로 받고 며칠 있다가 당그래 산에서 처형이 돼버리셨어.
엄한 사람한테 돈을 줬나봐. 그 정도 돈을 정확하게 찔렀으면 효과가 있었을 텐데 엄한 다리를 긁었던 거지.
육촌 작은집이 남산 당그래산 옆에 있어서 거기서 연락을 했든지 무슨 수가 있었겠지. 잡혀가서 며칠 있다가 돌아가셨다고.
유월 열 이튿 날이면 제일 더울 때 아닙니까.
시신 숨 떨어지면 썩을 땐데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작은아버지 차태옥과 어머니랑 내려가셔서 당그래 산에서 시신을 들추니까 썩어서 니꺼 내것도 몰라, 썩어가지고 누구인지 구별도 안됐던 거라.
자기 남편이니까 시신 썩은 거 그런 거는 이제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시신 을 찾아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뒤지셨던 거지.
아버지가 금이빨이 하나 있었다 케요. 자기 남편이니까 어머니는 냄새 나는 거 남에 시신 썩은 거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찾아야겠다, 어떻게든 찾아와야겠다는 일념으로 완전 부패돼 썩은걸 대충 말아서 이리 올라와 가꼬 산에 묘를 썼어.
어머니가 30살에 혼자 됐는데 장수하였어요. 딸, 아들 남매만 보고. 그때 할아버지가 물려준 농토가 있어서 머슴을 데리고 살다가 내가 장성하니 자나 깨나 자식걱정 하며 항시 나와서 도와주었지요.
2019년 12월14일 103세에 돌아가셨는데 나는 생각에 어머니랑 아버지가 생이별을 했다 생각해요. 30년 부부해로 안하면 부부가치가 없다했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해서 풍수하는 선생이 시키는 대로 화장을 했어요. 한자리에 파서 두 유골함을 나란히 한군데 붙여 합분해서 봉을 하나로 만들었어. 살아서는 못 만났지만 돌아가셔는 한 구덩이, 한 이불에서 편히 계시라고.
나는 산에 항시 올라가면 아버지 어머니께 절을 하면서 편히 계십시오 이야기를 해. 마침 건너 산 저거에 계시거든.
나는 우리 아들한테 그랬어. 너거는 나를 어려서부터 아버지, 아버지 부르는데 나는 그 석자를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 번도 못 불렀다.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모시고 나서야 아버지를 불러본다고.
큰아들이 캐나다에 있는데 시험 칠 때 마다 할아버지가 보이더라 하더이다. 그 아들이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가 도와주시는 거 같다고. 처음 캐나다에서 대학 들어갈 때 영어도 부족한데 대학가면 안 된다 포기했는데 할아버지가 들어가라 등을 떠밀었다고 해요.
어머니가 해 주신 아버지 얘기는 얼추 그런 이야기고, 활동사항을 보면 아버지는 노름이랑 여자관계를 철저히 말렸다 해. 옛날에는 사람들이 노름을 많이 했다 캐. 마을에서는 노름하면 그대로 들어가서 있는 돈 몰수 시키고 거 있는 놈 뺨 쳐서 다시는 못하게 하고 여자관계는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응께 늘 할아버지 그늘에서 컸는데 추구, 사자소학을 손수 썼어. 나는 학교 가야되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때라 이기라. 그림그치라도 써야 했어. 못쓰면 아침에 종아리라. 어머니는 눈물이 나지. 근데 예쁜 아이는 매를 많이 주라는 말이 맞아.
할아버지한테 배우다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서당에서 소학을 배우고 지금도 시간나면 항시 한문을 쓰고 싶어요. 시간만 나면.
나도 달력을 벌로 안 버리고 쫙 쓰는 기라. 절에서 반야심경이 있거든 281자인데 한문으로 1300번을 넘게 썼더라고. 자식 생각하며 너거는 공부하지만 그 고통을 내가 나눠보자 해서 하루 한번씩, 오늘 못쓰면 다음날 두 번
썼구마. 자식은 모르지만 부모는 자식한테 그런 애정이 있어. 요새 애들은 그런걸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자식 공부하는 걸 대신해 줄 수 없지만 진주 부산에서 학업증진하며 공부하는데 내 뜻을 암암리에 전하는 거지. 비록 나는 촌에서 농사짓지만.
아버지라 불러보고 아버지한테 머리도 쓰다듬어 보이고 냇물가에서 목욕도 같이해야 정이 있는데 나 낳기 석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정이 없지.
발자취랄까. 뭔가 아버지 반이라도 따라가야 하지 않겠나 싶어 나는 노름도 안하고 술도 안 먹어요.
위령탑에 비만 세워놔도 흡족해, 그다 꽃 놓고 절하면 돼. 탑에 가서 내가 눈물이 나서 혼났어.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응께 더는 바랄 것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