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자 인터뷰

장쾌영 유족 구술

작성일
2025-08-19 16:04:46
조회수 :
121
여기 초점을 받으면 키보드 화살표 상(↑)·하(↓) 키로 대본 스크롤을 할 수 있습니다. 장쾌영 유족 구술
옛날에 우리가 잘 살아서 머슴들을 데리고 살다 보니까 집에 아래채를 사랑방으로 이용했어.
머슴들 누워 자라고 사랑방을 차려서 옛날에 농사지을 때 비료도 없고 하니까 거기 자면서 오줌 모아서 보리밭에 뿌리고 할라고 해놨는데 그걸 빨갱이들 재울라고 만들었다고 그렇게 거짓말로 누명을 씌워서 그거 차린 죄로 아버지가 잡혀가셨어.
음력으로 유월달에 질삼 알지요, 불에 자갈을 달궈서 열에 삼이 노랗게 되게 말하자면 삼 삶는기라. 옛날에는 얄궂이 삼베옷만 입고 그걸 동네 회관 옆에서 모여서 하고 있는데 경찰이 와서 아버지만 잡아갔어. 사랑방 차렸다고.
그 질로 가서 집에 오지도 못하고, 그 당시 잡혀갔던 사람들이 함양 경찰서로 잡혀갔는데 거기서 트럭에 사람들 하나둘도 아니고 여럿을 태워서 수동면 본통 앞에 산골짝에 데려가 놓고 굴을 파놓고 거기다 대고 총을 다 쏴서 죽여 놨어. 이 마을에서는 아버지 혼자 잡혀갔어요.
그래가지고 시체도 못 찾고 거기서 죽었다는 것만 알고 나는 그때 어렸으니 우리 어머님만 시체를 찾으러 갔지. 내가 세 살, 동생은 뱃속에 있었고. 그길로 가서 그리 됐지. 그런데 가서 시체도 못 찾고 뫼도 없이 제사만 지내고 있어.
여기 한동네에 우리 고모가 계셔서 상세히 알아서 나한테 다 얘기를 해주셨었지. 그리 되셨다고 해. 우리는 어려서 모르지. 죽었다고 경찰서에서 시체를 찾으러 가라고 연락이 왔더라고 해요. 가보니 피투성이에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한 군데 한 차 싣고 가서 총으로 갈겨 버린 거지.
여기 뒤에가 황석산이거든, 거기 빨치산이 있었어. 나도 어머니랑 자는데 빨치산이 내려와서 쌀 조금 있는 걸 싹 다 털어갔어. 한번은 빨치산들 동네 안에 못 들어오게 커다란 대문을 해 놓고 군인이 잠복을 하고 있는데 대문을 넘어 올라고 하는 빨갱이 한명이 총 맞아 죽는 걸 봤어.
저녁에는 내려와서 쌀 털어 가고 하는데 잡을 재간이 없었어, 그렇게 안하면. 빨갱이들 잡을라고 군대가 봉전, 황산 사이에 산 날망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맨날 돌아가면서 부락민들이 밥 해다 바쳤어. 밥해주는 곳을 고찌라고 했대. 아이고 참...
아버지는 외동아들이었어. 할아버지도 외동이었고. 고모님은 세분이 살아계셨어. 한동네 살았던 한분이 있었지. 우리가 그때 좀 잘 살고 하니까 원수를 졌는지 옆에서 거짓말을 해서 누명을 씌웠으니.
아버지 그리 되시고 그 길로 집구석 폭삭 망했지. 논도 다 팔아먹고 딱 너마지기 남았어. 그 많은 논 다 팔아먹고, 우리 키우니라꼬. 자꾸 흉년은 지지, 세금내야 되지, 먹고살아야 되지, 너무 어렵게 살았어. 그래가지고 내가 살아나오면서 논도 조금 사고, 애들 공부시키느라 욕봤어. 애들한테 한 달 용돈을 한 번에 못 줘 봤어, 조금주고 또 주고, 조금 주고 또 주고. 남들처럼 용돈도 풍족하게 못주고. 그래도 애들은 다 잘 컸어.
어려서 집 구석이 그렇게 되다 보니까 나는 공부도 못했어. 초등학교도 늦게 11살 때 들어가서 3년 하고 졸업했어. 그때 4H가 있었는데 공부를 가르쳐줘서 좀 한기라. 초등학교 들어가서 시험을 치니 3학년으로 넣어줬지. 아 근데 동생이 3학년에 다니고 있었던기라, 그래서 동생은 한 학년 내려가고 나도 그리 학교를 졸업했어. 그거라도 했으니 내가 한글이라도 하지. 울기도 많이 했지, 나는 왜 공부도 못하나 하고. 더 배웠으면 고생도 덜 했을걸.
그리고 어머니 시킨 대로 집에서 일만 하는 기라. 그러고 나도 결혼하고 애들은 키워야 되니까 정말 열심히 살았어.
여태까지 빚으로 살아나왔어, 농사지어 갚고 농협에 또 빚지고 농사짓고. 이제 겨우 다 갚았어. 
담배농사를 9년 지어서 애들 공부시켰는데 그걸로는 택도 없었지. 그래서 우리 동네서는 최고 앞에 사과농사를 지었지. 
지금은 나이 먹어서 다 못하고 반만 사과농사를 짓고 있지. 애들이 이만큼 잘 자라서 지금은 맘 놓고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