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근 유족 구술
- 작성일
- 2025-08-19 16:03:18
- 조회수 :
-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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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근 유족 구술
나는 유복자에요.
저는 우리 아버지랑 작은 아버지를 잃었어요.
아들 형제는 세 명이었는데 두 분이 그 일로 희생당하시고 한 분은 군대에서 텐트에서 주무시다가 이북 놈들한테 화염방사기로 두들겨 맞아서 육군 병원으로 후송돼서 죽다 살았는데 제대하고 조금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내가 종가살림을 21살 때 맡았어요, 어쩌지도 못하고 살았지. 48년 음력으로 11월 그믐날에 아버지가 세상 버리셨어요. 우리 아버지 제사가 그믐이에요.
나는 태어나서 어머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이야기 듣고 또 우리 작은 아버지가 그때 살아계셔서 들었어요.
아이고... 사는 게 사는 것도 아니고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하고. 우리 친척들 같은 경우는 군대를 가서 민정 경찰을 들어가려고 해도 신원 조회가 있어서 하지도 못했어요. 이제 명예 회복을 하고 나서 조금씩 이런 게 풀리기 시작한 거지 그전에는 공무원 시험을 칠 수가 있나 뭐 아무것도 못하고 딱 묶여서 살았어요. 희생자 자식들은 제대로 풀린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참 그때는 먹고사는 게 사는 긴가 싶고...
우리가 그때는 여기서 4킬로 정도 더 올라가서 살았어요. 그때는 경찰들 앞잡이가 있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한테 와서 두들겨 패고 돈이나 좀 주고 하면 풀어주고 하는 일이 많았었나 봐요. 그날은 우리 아버지랑 다른 한 분이 또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갔어요.
경찰들이 서하 지서에 잡아갔어. 우리 아버지는 맞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셨고 한 사람은 쥑살나게 두들겨 맞기만 하고 살아 나오셨대요. 그분은 돌아가신지 한 10년 정도 되셨어요. 서하에서 죽은 사람을 함양경찰서로 데려갔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함양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아왔어. 집안에 어른들이 찾으러 갔지요. 죽어 놓으니 어쩌지도 못하고 싣고 간 거지. 가면 갔다 오겠지 하고 갔는데 죽었지. 마을에 수시로 경찰이 와서 사람들을 이유 없이 잡아갔어.
작은 아버지는 다곡리 대항 부락 잿날망으로 끌려갔어. 보도연맹이라고. 끌려간 사람들한테 구덩이를 파라고 하고 거기 둘러 세워놓고 총살 시켰지. 그때 거기는 그분들만 죽인 게 아니고 다른 동네에서도 잡아와서 죽이고 했나 보더라고요. 어른들한테 다 들은 말이야.
아버지가 일본에 갔다 왔어요. 인물도 잘 생기고, 동네 어른들이 여기 들어오면 훤했다고 해요. 키도 크고.
우리 증조부님은 통정대부까지 했어요. 지금으로 도지사 정도 되는 급이라지요. 할아버지도 학자, 증조부님은 통정대부까지 하고 잘 사는 집이었지. 우리 집이 학자 집안이고 벼슬하신 분도 있고 해서 조금은 살만했어요. 그러니 와서 괴롭혔어요. 때리면 돈 싸 들고 오고 하니까. 근데 우리 아버지는 정통으로 맞으셨는지 손에 살이 내렸는지 바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때 다 뺏기고 아무것도 없어서 고생을 무진장 했어요.
소도 몰고 갔어요. 암소가 좋은 게 있었는데 말도 잘 들었다는데 빨갱이 놈들이 짐을 싣고 다녀야 되니까 우리 집 암소를 가져가고 황소를 주고 갔어요. 근데 또 그 황소는 빨갱이가 준거라고 지서에서 가져가서 어쨌는지도 몰라요. 그 소가 우리 살림살이였는데.
아버지가 큰집 양자로 갔거든. 그래서 제사도 많고. 아무것도 없응께 제사 상에 조기 사러가기도 힘든기라. 유복자로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을 일구고 큰 형님이 죽었으니 나이 스물한 살에 조카들까지 다 키우고. 지금 스물한살이면 어린애 아니요. 이리 기구한 사람은 없을거요.
나는 유복자니까 들어서 아는 거라. 군인들이 시킨 건지 경찰들이 시킨 건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보도연맹은 아마 군인들이었을 거예요. 이런 일들이 세 개로 나누어져 있어요. 경찰한테 죽은 사람들 군인한테 죽은 사람들 형무소에서 죽은 사람들 이렇게요.
저기 도북은 부락민을 다 잡아다가 그렇게 죽여 놓고 지금 당그래 산에는 시신이 얼마만큼 묻혀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하준수가 여기 와서 살았었대요. 그래서 이 동네가 피해를 무지하게 본 거에요. 우리 집사람 아버님은 앞문으로 들어오는데 뒷문으로 나가 숨어서 살았어요. 그때는 이집 저집 찾아다니면서 잡아다 죽였어요.
작은 아버지 시신을 며칠 만에 찾으러 갔는데 시신이 너무 상해서 얼굴이나 몸을 보고는 찾지도 못해서 우리 작은 어머님이 바느질을 왼손으로 하셔서 그 바느질 방향 보고 찾아왔어요.
너무 억울해도 모르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당하고만 살은 거예요. 아이고 참. 내가 죄 지은 것도 없으니 뭐 하러 오라는지 가보면 알지, 가보고 온다 하고 갔는데 그냥 죽었어.
서하에 피해자들이 많아요. 많은데 명예 회복된 사람은 여섯뿐이에요. 다 객지로 나가고 세상 버리고 해서 연락이 안돼요 다들. 운곡에 계신 분은 이제 나이가 많아서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내가 명예 회복 처음 시작할 때 만든 서류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우리는 면책이 되어서 꼭 보관하고 있는 거예요. 연락되는 사람이 없고 있어도 희생자 모임에 안 오는 분들도 계시고. 아들 대에서 끝나고 손자들은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명예 회복은 됐지만 보상이고 이런 거 일절 없어요.
시효가 한 달 넘어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할 권한도 없었어요. 보도연맹 희생자들은 시효가 석 달 정도 남았었고 우리처럼 군경에 죽은 사람들은 시효가 지나서 아무 보상도 없었어요.
그래도 위령비라도 세워놔서 조금 낫지. 도북에 차용현 회장님이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분은 평생을 이 일에 매달리셨는데 우리 유족들은 제대로 보답도 못해드리고 그렇지요.
나는 유복자에요.
저는 우리 아버지랑 작은 아버지를 잃었어요.
아들 형제는 세 명이었는데 두 분이 그 일로 희생당하시고 한 분은 군대에서 텐트에서 주무시다가 이북 놈들한테 화염방사기로 두들겨 맞아서 육군 병원으로 후송돼서 죽다 살았는데 제대하고 조금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내가 종가살림을 21살 때 맡았어요, 어쩌지도 못하고 살았지. 48년 음력으로 11월 그믐날에 아버지가 세상 버리셨어요. 우리 아버지 제사가 그믐이에요.
나는 태어나서 어머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이야기 듣고 또 우리 작은 아버지가 그때 살아계셔서 들었어요.
아이고... 사는 게 사는 것도 아니고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하고. 우리 친척들 같은 경우는 군대를 가서 민정 경찰을 들어가려고 해도 신원 조회가 있어서 하지도 못했어요. 이제 명예 회복을 하고 나서 조금씩 이런 게 풀리기 시작한 거지 그전에는 공무원 시험을 칠 수가 있나 뭐 아무것도 못하고 딱 묶여서 살았어요. 희생자 자식들은 제대로 풀린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참 그때는 먹고사는 게 사는 긴가 싶고...
우리가 그때는 여기서 4킬로 정도 더 올라가서 살았어요. 그때는 경찰들 앞잡이가 있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한테 와서 두들겨 패고 돈이나 좀 주고 하면 풀어주고 하는 일이 많았었나 봐요. 그날은 우리 아버지랑 다른 한 분이 또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갔어요.
경찰들이 서하 지서에 잡아갔어. 우리 아버지는 맞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셨고 한 사람은 쥑살나게 두들겨 맞기만 하고 살아 나오셨대요. 그분은 돌아가신지 한 10년 정도 되셨어요. 서하에서 죽은 사람을 함양경찰서로 데려갔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함양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아왔어. 집안에 어른들이 찾으러 갔지요. 죽어 놓으니 어쩌지도 못하고 싣고 간 거지. 가면 갔다 오겠지 하고 갔는데 죽었지. 마을에 수시로 경찰이 와서 사람들을 이유 없이 잡아갔어.
작은 아버지는 다곡리 대항 부락 잿날망으로 끌려갔어. 보도연맹이라고. 끌려간 사람들한테 구덩이를 파라고 하고 거기 둘러 세워놓고 총살 시켰지. 그때 거기는 그분들만 죽인 게 아니고 다른 동네에서도 잡아와서 죽이고 했나 보더라고요. 어른들한테 다 들은 말이야.
아버지가 일본에 갔다 왔어요. 인물도 잘 생기고, 동네 어른들이 여기 들어오면 훤했다고 해요. 키도 크고.
우리 증조부님은 통정대부까지 했어요. 지금으로 도지사 정도 되는 급이라지요. 할아버지도 학자, 증조부님은 통정대부까지 하고 잘 사는 집이었지. 우리 집이 학자 집안이고 벼슬하신 분도 있고 해서 조금은 살만했어요. 그러니 와서 괴롭혔어요. 때리면 돈 싸 들고 오고 하니까. 근데 우리 아버지는 정통으로 맞으셨는지 손에 살이 내렸는지 바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때 다 뺏기고 아무것도 없어서 고생을 무진장 했어요.
소도 몰고 갔어요. 암소가 좋은 게 있었는데 말도 잘 들었다는데 빨갱이 놈들이 짐을 싣고 다녀야 되니까 우리 집 암소를 가져가고 황소를 주고 갔어요. 근데 또 그 황소는 빨갱이가 준거라고 지서에서 가져가서 어쨌는지도 몰라요. 그 소가 우리 살림살이였는데.
아버지가 큰집 양자로 갔거든. 그래서 제사도 많고. 아무것도 없응께 제사 상에 조기 사러가기도 힘든기라. 유복자로 아무것도 모르는데 집을 일구고 큰 형님이 죽었으니 나이 스물한 살에 조카들까지 다 키우고. 지금 스물한살이면 어린애 아니요. 이리 기구한 사람은 없을거요.
나는 유복자니까 들어서 아는 거라. 군인들이 시킨 건지 경찰들이 시킨 건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보도연맹은 아마 군인들이었을 거예요. 이런 일들이 세 개로 나누어져 있어요. 경찰한테 죽은 사람들 군인한테 죽은 사람들 형무소에서 죽은 사람들 이렇게요.
저기 도북은 부락민을 다 잡아다가 그렇게 죽여 놓고 지금 당그래 산에는 시신이 얼마만큼 묻혀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하준수가 여기 와서 살았었대요. 그래서 이 동네가 피해를 무지하게 본 거에요. 우리 집사람 아버님은 앞문으로 들어오는데 뒷문으로 나가 숨어서 살았어요. 그때는 이집 저집 찾아다니면서 잡아다 죽였어요.
작은 아버지 시신을 며칠 만에 찾으러 갔는데 시신이 너무 상해서 얼굴이나 몸을 보고는 찾지도 못해서 우리 작은 어머님이 바느질을 왼손으로 하셔서 그 바느질 방향 보고 찾아왔어요.
너무 억울해도 모르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당하고만 살은 거예요. 아이고 참. 내가 죄 지은 것도 없으니 뭐 하러 오라는지 가보면 알지, 가보고 온다 하고 갔는데 그냥 죽었어.
서하에 피해자들이 많아요. 많은데 명예 회복된 사람은 여섯뿐이에요. 다 객지로 나가고 세상 버리고 해서 연락이 안돼요 다들. 운곡에 계신 분은 이제 나이가 많아서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내가 명예 회복 처음 시작할 때 만든 서류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우리는 면책이 되어서 꼭 보관하고 있는 거예요. 연락되는 사람이 없고 있어도 희생자 모임에 안 오는 분들도 계시고. 아들 대에서 끝나고 손자들은 관심들이 없더라고요. 명예 회복은 됐지만 보상이고 이런 거 일절 없어요.
시효가 한 달 넘어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할 권한도 없었어요. 보도연맹 희생자들은 시효가 석 달 정도 남았었고 우리처럼 군경에 죽은 사람들은 시효가 지나서 아무 보상도 없었어요.
그래도 위령비라도 세워놔서 조금 낫지. 도북에 차용현 회장님이 진짜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분은 평생을 이 일에 매달리셨는데 우리 유족들은 제대로 보답도 못해드리고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