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성 유족 구술
- 작성일
- 2025-08-19 16:00:16
-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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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성 유족 구술
아버지 얼굴 물어보면 어른들이 만날 거울보라 했어
이런 거 인터뷰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나이 먹고도 나는 우리 아버지 사건만 생각하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고 눈물부터 나올 지경인데.
내가 차용현 회장님이랑 한 마을에 사니까 그 동네서 우리 아버지랑 32명이 그리 됐거든.
내가 도북에서 우리 할매랑 살다가 우리 할매가 연세가 많아서 세상 버리시고 살데가 없어서 우리 고모집에 와서 살다가 성장해서 결혼해서 멀리도 못가고 여기서 사는 기라.
우리 아버지 성함이 임채옥 이고 어머니 이름도 알 수 없다. 나 낳고 한달 만에 그리되셨어 윤칠월에. 나 태어나고 40일만에 세상 베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에이고, 내가 첫애고 형제도 없고 하니까 어머니가 개가를 하면서 난 할매랑 살고 아버지가 없으니 여기 저기 다니며 고모한테 의탁해 살았지.
아버지 생각하면 눈물만 나, 사건 얘기 하면 목이 메이고, 나 같은 경우 아무 사실도 모르지만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만으로 알지.
우리 아버지가 그날 장마철이라 논 들러보고 논에 물꼬 트러 다녀오시는데 도북마을 동산에서 다들 모이라 해서 아무 죄가 없으니 떳떳이 나가셨지. 빨갱이 짓을 했다카면 의심해서 안 나갔지. 아무 죄가 없으니 나갔지.
그길로 집에 못 돌아오셨어. 어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스물 두세 살 때 일이야. 울 어머니랑 결혼한지도 얼마 안됐어. 아버지 그리 되고 어머니는 넘에 집에 가서 그냥 살면 되는가 싶어서 살았겠지. 근데 뭐 주민등록 말소가 돼서 사망신고도 못하것던데.
나를 어리게 두고 가서 그런지 만나지도 않을라하고 소식도 전하지 말라고 했어. 요새 같으모 전화라도 하지, 그때는 발로 걸어서 안가면 소식을 못 전하던 때지. 그러니 소식을 모를 수 밖에.
우리 아버지도 외동, 작은 아버지도 없어. 손이 안끊어질라 켔는가 내가 낳지. 아무도 없어. 여기 슬레트 집에서 살면서 내 몸둥이를 팔아 성장해서 자식 공부시키고...
우리 동갑이 너댓 명 됐는데 그중에 유복자가 셋인데 뱃속에 들었을 때 아버지 돌아가셨지. 나는 다행이 태어나고 아버지가 세상 베렸지, 에이고. 하나는 죽고 또 하나는 딸래집으로 이사 가고 친구라도 자주 안 만나니 어찌 사는지 모르지. 유복자는 수동 도북에 아무도 안살아. 생일 빠른 임춘택만 도북산다. 생일이 빨라서 49년생으로 돼 있지. 나는 호적에 실어줄 사람도 없고 그 당시 구장한테 실어달라 해서 나는 50년생으로 돼 있어.
나는 17살 고모집에 왔어, 고모가 나를 결혼시켜 준 택이지. 17살 전에는 나는 할머니랑 정부 도움도 없이 살면서 쌀 떨어지면 고모댁 가서 쌀 몇 되 받아다가 책가방에 짊어지고 가져와서 먹고 살았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나를 몇 살 묵을 때까지 키워줬지, 안죽을만큼 키워주고 할머니한테 놔두고 하룻저녁 가 버렸어. 할머니는 그 당시 나이가 많았지, 그래도 오래 사셨어 72살에 세상 베렸으니까. 할아버지도 나는 몰라, 에휴.
초등학교 하고 그 후엔 공부도 못했어. 초등학교 댕기다가 부모있는 애들은 다 중학교 가는데 중학교 못 간 사람은 나뿐이야. 나는 생활고 때문에 힘이 들어서 애들 학교 갈 때 망태매고 가서 나무 주워다가 불 피우고 그러고 컸어.
여기 합동묘지 한다고 고인들 모셔올 때 데굴데굴 구르면서 울었어.
아버지 한번 불러 보지도 못하고 죽은 분들 뼈를 다 모아서 하나로 하니 니 뼈인지 내 뼈인지, 아버지 뼈인지 남에 뼈인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유골 찾으러 갔을 때는 내가 결혼해서 애 둘 낳았을 때지. 서른 몇 살 됐을 때. 차 회장이 당그래산 현장에 가보고, 근데 경찰이 오고 그랬데. 가시덤불이 싸여있는데 그때는 장비도 없고 유족들이 삽, 괭이로 팠어.
우리 아버지한테 내가 첫아들이니까 내가 젤 젊고 위에 어른은 나이가 많았지. 차 회장 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도 있었지. 막내아들 된 사람도 있고 하니 나이차이 많이 나지.
간첩질 빨갱이 짓이라도 하고 가셨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순수하게 그런 것도 안한 사람을 같다가...
노무현 정부가 명예회복 해 준다 해서 서울까지 갔었지. 명예회복 받아도 보상 못 받았어.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 부모가 억울하니까. 보상을 아무것도 못받았어. 우리는 유효기간이 지나서 안 되고 뒤에 한 사람은 보상을 받은 사람이 몇 있고. 도북 사람은 같이 한다고 기다리다가 기간이 늦었다고 안됐어.
부모님이 죽었는데 돈 받아서 쓸 때도 없지만 그래도 보상이라도 받으면 우리 아버지 산소라도 투자하자 그랬는데...
저거 합동묘 처음에 할 때는 32인 중에서 아들 다르고 형제 다르고 마음이 다 틀리더라고. 아들 되는 사람은 그 당시 100만원을 냈지. 내가 젤 젊었어. 울 아버지가 젤 젊고 첫 아들잉께. 열인가 그랬어, 자녀가. 형제도 많이 죽었어. 한 집에 세 명이 죽은데도 있어. 돈 내는 건 꺼리고. 자녀들은 울 아버지니까 돈이 어찌됐든지 해 보자 했지. 아버지 된 사람은 100만원, 열이면 1000만원. 그때 이 돈이 억수로 컸지. 큰 액수였지. 100만원도 내기 힘들었지. 아이구 참.
내가 74살이니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지 74년 됐지. 나도 죽을 때가 됐으니 이대로 죽는 거지. 아들 다르고 손자 다른데 우리만큼 관심이 없지. 아이구.
우리 아버지 사진도 한 장 없고 아버지 소리도 한번 못해보고 얼굴도 몰라.
“너거 아버지 보고 싶으면 거울 쳐다보라” 아버지 얼굴 물어보면 어른들이 만날 거울보라 했어. 나랑 아버지랑 많이 닮았나봐. 사진도 어찌 그리 없었을까. 먹고살기 힘드니 사진이 없지. 결혼사진도 없고, 아이고, 사진 한 장 안남기고.
배우지도 못하고 땅만 파고 살았어. 나는 못 배웠으니 자녀라도 시켜야겠다 싶어서 돈 되는 거라면 안해 본 게 없지. 내 몸만 골벵들지. 과수원 한 20년 했어, 담배농사도 짓고 남의 공사판에도 다니고. 시골에서 서울에 공부 시킬라면 힘들지. 시골에서 서울 차비만 해도 힘들 때였는데 4년을 공부시켰지. 아들이 내 뜻을 알고 공부도 잘하고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받고 했지.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평범하게 잘 지낼 수 있을 환경이었지. 중학교 갈 정도, 남의 집에 양식 빌리러 갈 정도는 아니지. 아버지 안계시니 집이 완전히 파탄됐지. 그날 일로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뀐 거지.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빨갱이 누명이나 씌워다가 죽이고.
나는 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지. 도북 사람 죽은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지. 할머니 입장에서는 외동아들인데 허무하게 죽고 손자한명 보고 산 택이지.
형제간들 있는 사람 부럽고 부모 있는 사람 부럽고, 그 세월이 다 지나가고 내가 이리 늙었어. 부모 있는 사람 친구 보면 얼마나 부럽든지... 아버지 소리 한번 못해보고 어머니 소리 한번 못해보고 성장해서는 그 소리 한번 못해봤지. 진짜 부모에 포부 진 사람이야. 나는 부모 있는 애들이 너무 부러웠어.
나도 죽을 때가 다 됐어, 우리 죽으면 누가 이 얘기를 해 줄꼬. 아무도 없지
아버지 얼굴 물어보면 어른들이 만날 거울보라 했어
이런 거 인터뷰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나이 먹고도 나는 우리 아버지 사건만 생각하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고 눈물부터 나올 지경인데.
내가 차용현 회장님이랑 한 마을에 사니까 그 동네서 우리 아버지랑 32명이 그리 됐거든.
내가 도북에서 우리 할매랑 살다가 우리 할매가 연세가 많아서 세상 버리시고 살데가 없어서 우리 고모집에 와서 살다가 성장해서 결혼해서 멀리도 못가고 여기서 사는 기라.
우리 아버지 성함이 임채옥 이고 어머니 이름도 알 수 없다. 나 낳고 한달 만에 그리되셨어 윤칠월에. 나 태어나고 40일만에 세상 베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에이고, 내가 첫애고 형제도 없고 하니까 어머니가 개가를 하면서 난 할매랑 살고 아버지가 없으니 여기 저기 다니며 고모한테 의탁해 살았지.
아버지 생각하면 눈물만 나, 사건 얘기 하면 목이 메이고, 나 같은 경우 아무 사실도 모르지만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만으로 알지.
우리 아버지가 그날 장마철이라 논 들러보고 논에 물꼬 트러 다녀오시는데 도북마을 동산에서 다들 모이라 해서 아무 죄가 없으니 떳떳이 나가셨지. 빨갱이 짓을 했다카면 의심해서 안 나갔지. 아무 죄가 없으니 나갔지.
그길로 집에 못 돌아오셨어. 어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스물 두세 살 때 일이야. 울 어머니랑 결혼한지도 얼마 안됐어. 아버지 그리 되고 어머니는 넘에 집에 가서 그냥 살면 되는가 싶어서 살았겠지. 근데 뭐 주민등록 말소가 돼서 사망신고도 못하것던데.
나를 어리게 두고 가서 그런지 만나지도 않을라하고 소식도 전하지 말라고 했어. 요새 같으모 전화라도 하지, 그때는 발로 걸어서 안가면 소식을 못 전하던 때지. 그러니 소식을 모를 수 밖에.
우리 아버지도 외동, 작은 아버지도 없어. 손이 안끊어질라 켔는가 내가 낳지. 아무도 없어. 여기 슬레트 집에서 살면서 내 몸둥이를 팔아 성장해서 자식 공부시키고...
우리 동갑이 너댓 명 됐는데 그중에 유복자가 셋인데 뱃속에 들었을 때 아버지 돌아가셨지. 나는 다행이 태어나고 아버지가 세상 베렸지, 에이고. 하나는 죽고 또 하나는 딸래집으로 이사 가고 친구라도 자주 안 만나니 어찌 사는지 모르지. 유복자는 수동 도북에 아무도 안살아. 생일 빠른 임춘택만 도북산다. 생일이 빨라서 49년생으로 돼 있지. 나는 호적에 실어줄 사람도 없고 그 당시 구장한테 실어달라 해서 나는 50년생으로 돼 있어.
나는 17살 고모집에 왔어, 고모가 나를 결혼시켜 준 택이지. 17살 전에는 나는 할머니랑 정부 도움도 없이 살면서 쌀 떨어지면 고모댁 가서 쌀 몇 되 받아다가 책가방에 짊어지고 가져와서 먹고 살았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나를 몇 살 묵을 때까지 키워줬지, 안죽을만큼 키워주고 할머니한테 놔두고 하룻저녁 가 버렸어. 할머니는 그 당시 나이가 많았지, 그래도 오래 사셨어 72살에 세상 베렸으니까. 할아버지도 나는 몰라, 에휴.
초등학교 하고 그 후엔 공부도 못했어. 초등학교 댕기다가 부모있는 애들은 다 중학교 가는데 중학교 못 간 사람은 나뿐이야. 나는 생활고 때문에 힘이 들어서 애들 학교 갈 때 망태매고 가서 나무 주워다가 불 피우고 그러고 컸어.
여기 합동묘지 한다고 고인들 모셔올 때 데굴데굴 구르면서 울었어.
아버지 한번 불러 보지도 못하고 죽은 분들 뼈를 다 모아서 하나로 하니 니 뼈인지 내 뼈인지, 아버지 뼈인지 남에 뼈인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유골 찾으러 갔을 때는 내가 결혼해서 애 둘 낳았을 때지. 서른 몇 살 됐을 때. 차 회장이 당그래산 현장에 가보고, 근데 경찰이 오고 그랬데. 가시덤불이 싸여있는데 그때는 장비도 없고 유족들이 삽, 괭이로 팠어.
우리 아버지한테 내가 첫아들이니까 내가 젤 젊고 위에 어른은 나이가 많았지. 차 회장 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도 있었지. 막내아들 된 사람도 있고 하니 나이차이 많이 나지.
간첩질 빨갱이 짓이라도 하고 가셨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순수하게 그런 것도 안한 사람을 같다가...
노무현 정부가 명예회복 해 준다 해서 서울까지 갔었지. 명예회복 받아도 보상 못 받았어.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 부모가 억울하니까. 보상을 아무것도 못받았어. 우리는 유효기간이 지나서 안 되고 뒤에 한 사람은 보상을 받은 사람이 몇 있고. 도북 사람은 같이 한다고 기다리다가 기간이 늦었다고 안됐어.
부모님이 죽었는데 돈 받아서 쓸 때도 없지만 그래도 보상이라도 받으면 우리 아버지 산소라도 투자하자 그랬는데...
저거 합동묘 처음에 할 때는 32인 중에서 아들 다르고 형제 다르고 마음이 다 틀리더라고. 아들 되는 사람은 그 당시 100만원을 냈지. 내가 젤 젊었어. 울 아버지가 젤 젊고 첫 아들잉께. 열인가 그랬어, 자녀가. 형제도 많이 죽었어. 한 집에 세 명이 죽은데도 있어. 돈 내는 건 꺼리고. 자녀들은 울 아버지니까 돈이 어찌됐든지 해 보자 했지. 아버지 된 사람은 100만원, 열이면 1000만원. 그때 이 돈이 억수로 컸지. 큰 액수였지. 100만원도 내기 힘들었지. 아이구 참.
내가 74살이니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지 74년 됐지. 나도 죽을 때가 됐으니 이대로 죽는 거지. 아들 다르고 손자 다른데 우리만큼 관심이 없지. 아이구.
우리 아버지 사진도 한 장 없고 아버지 소리도 한번 못해보고 얼굴도 몰라.
“너거 아버지 보고 싶으면 거울 쳐다보라” 아버지 얼굴 물어보면 어른들이 만날 거울보라 했어. 나랑 아버지랑 많이 닮았나봐. 사진도 어찌 그리 없었을까. 먹고살기 힘드니 사진이 없지. 결혼사진도 없고, 아이고, 사진 한 장 안남기고.
배우지도 못하고 땅만 파고 살았어. 나는 못 배웠으니 자녀라도 시켜야겠다 싶어서 돈 되는 거라면 안해 본 게 없지. 내 몸만 골벵들지. 과수원 한 20년 했어, 담배농사도 짓고 남의 공사판에도 다니고. 시골에서 서울에 공부 시킬라면 힘들지. 시골에서 서울 차비만 해도 힘들 때였는데 4년을 공부시켰지. 아들이 내 뜻을 알고 공부도 잘하고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받고 했지.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평범하게 잘 지낼 수 있을 환경이었지. 중학교 갈 정도, 남의 집에 양식 빌리러 갈 정도는 아니지. 아버지 안계시니 집이 완전히 파탄됐지. 그날 일로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뀐 거지.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빨갱이 누명이나 씌워다가 죽이고.
나는 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지. 도북 사람 죽은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지. 할머니 입장에서는 외동아들인데 허무하게 죽고 손자한명 보고 산 택이지.
형제간들 있는 사람 부럽고 부모 있는 사람 부럽고, 그 세월이 다 지나가고 내가 이리 늙었어. 부모 있는 사람 친구 보면 얼마나 부럽든지... 아버지 소리 한번 못해보고 어머니 소리 한번 못해보고 성장해서는 그 소리 한번 못해봤지. 진짜 부모에 포부 진 사람이야. 나는 부모 있는 애들이 너무 부러웠어.
나도 죽을 때가 다 됐어, 우리 죽으면 누가 이 얘기를 해 줄꼬. 아무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