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유족 구술
- 작성일
- 2025-08-19 15: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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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주 유족 구술
저희 아버지는 이도갑 입니다. 생년월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오십여섯쯤 되신 걸로 기억합니다. 어머님은 신필금 입니다. 생년월일은 기억나지 않고 한 오십쯤 될 때 그 일을 겪으신 걸로 압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아마 스물한 살쯤 됐을 거예요. 1950년인가 51년에 사건이 났어요. 6.25를 스무 살 때 겪었으니 51년이 맞겠네요.
그때 공비가, 그 당시에는 빨갱이라 했거든요. 6.25가 나기 전부터 부락에 자주 왕래를 했어요. 근데 6.25 이후 부락에 내려와서 이 동네 젊은 사람들이 공비 여자를 잡았어요. 그 다음날 와서 이장집 단장집 그리고 그 여자공비 잡은 사람 집에 불을 질렀어요. 그리고 공비 잡아준 사람을 동네 뒤에서 돌로 찧어서 다 죽여 버렸어요.
그 후에 한참 안 오더니 하룻저녁 와서는 소도 몰아가고 부락민을 많이 데리고 갔어요. 그때 우리 아버지가 잡혀간기라요. 그때가 음력으로 10월 7일이라. 눈비가 와서 약간 얼었을 때인데 내 아버지가 잡혀가서 나락을 짊어지고 기백산까지 갔다가 돌아가셨어요. 여럿이 갔는데 돌아온 사람도 있고 도망간 사람도 있고 갔다가 죽은 사람이 네댓이 돼요.
아침에 부락민이 올라가 보니까 아버지가 논에서 돌아가셔 있고 우리 백부가 그 조금 더 위에서 죽어 계시고 여기 근처 집 아들이 스물일곱 먹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그때 죽었어. 근데 그 사람들은 이번에 진상규명할 때 안 해서 이름이 없어요.
그날 올라가니께 아버지가 쭈그려 앉아서 죽어계시더라고요. 큰 아버지는 산 속 한참 안에 있고. 몇몇은 안 가려고 고집을 부리니까 거기서 죽이고 우리 아버지는 기백산까지 가셔서 짐을 내려주고 오다가 그 추운데 노인이 삼베만 입고 갔다가 얼어 죽었어요. 빨갱이들이 와서 사람들을 잡아서 자기들 사는 기백산까지 끌고 가는데 안 갈 수가 있나요. 가다가 도망 나온 사람도 있고 끝끝내 갔다가 살아 나온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나이 많은 동네 사람들은 거의 다 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살짝 피해서 온 사람도 많은데 우리 아버지는 양심가라서 꼬박꼬박 짊어지고 그 산에 올라갔다가 오는 길에 배가 너무 고프시고 추우니까 망개를 하나 잡숫더니 그 자리에 콱 주저앉아서 돌아가셨다고 해요.
빨갱이가 내려와서 동네를 싹 뒤져가지고 곡식 다 가져가고 숟가락이니 뭣이니 다 가져갔대요. 여자 하나가 따라서 내려와서 구석구석 다 뒤져서 가져갔다 해요. 그 여자는 여기 밑에 부락에서 빨갱이 나간 사람이었는데 여기를 잘 아니까 자연스레 자주 왔던 거예요. 그래가지고 소를 몰고 가던 사람도 고삐를 놓고 도망을 가고 해서 살 사람들은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기어코 갔다가 오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원래 여러 번 자주 왔었는데 그 뒤에는 빨갱이가 한 번도 안 왔어요. 따라가다 죽은 사람, 오다가 죽은 사람, 달려들다가 맞아 죽은 사람 그랬어요. 밤에 빨갱이가 와서 무조건 사람들을 잡아내면서 가자고 하는데 어디서 누가 데려가는지도 모르고 해서 나는 무조건 숨었지요. 무조건 도망가야 돼요. 아버지랑 그때 같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다 피하고 나이 많은 사람만 다 끌려갔어요.
그때 부락이 한 육십 몇 호 돼서 사람이 많았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부락민들이 끌려가서 안 온 사람들 다 찾을 때까지 기백산 꼭대기까지 뒤지고 올라갔어요.
그래서 한사람 빼고 시신을 다 찾아서 내려왔어요. 한 사람 그분은 살았나 죽었나 소식이 없어요. 그 사람은 자기 사촌 형이 민보단 이라는 조직에 부락 단장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빨갱이 오니까 피하라고 피신을 시키려고 하는데 이미 방에 빨갱이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빨갱이가 그 집에 불 지르고 잡혀가서 소식이 없어요. 죽었지요 뭐.
그날 많은 사람이 끌려 올라갔는데 살아나오고 마지막까지 다섯이 도망 못 가고 올라가서 세 명이 돌아가셨어요. 도북 위령비에는 우리 아버지 큰아버지 사촌 형님 세 분이 계시고 여기 다른 집은 신고를 못하고 조사를 못해서 못 올렸어요.
그 여자를 붙잡아버리니까 보복을 하러 내려 온 거예요. 그 여자를 잡은 사람은 돌로 찧어 죽였어요 마을 뒤에서. 집에 불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어요.
옛날에 특공대라는 게 있었는데 날마다 부락민들한테 밥 얻어먹고 잠만 자요. 보수도 없이 경찰 밑에서 있다가 부락민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하면서 있었는데 지켜주기는커녕 더 빨리 숨어버려요. 빨갱이가 오면. 사찰 유격대라고 빨갱이 하다가 자수한 사람들 군부대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한테는 옷도 좋은 것 주고 총도 좋은 것 주고 대우도 잘해줬어요. 완전 A급으로요. 더 세요, 잘 잡고. 특공대는 아무 힘도 없었어요. 그런데 부락에서 밥은 해줘야 되고...
빨갱이도 와서 털어가기만 하고 크게 나쁜 짓은 안 했는데 신고를 하고 잡아주고 하는 바람에. 그전에 민보 단장이 우리 사촌형님인 이달주였는데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라서 나랑 아버지랑 밤에 갔는데 죽어 있었어. 이장은 도망가고 때려죽인 사람, 총에 맞은 사람 그랬어.
그분은 위령탑에 이름이 안 올라갔어요. 남의 집에 양자로 갔는데 정식 호적이 안 올라가서 결국 이름도 못 올렸어요. 내가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안 해주니 그냥 개죽음이지요 뭐.
나는 동경에서 공부를 했어요. 해방되는 해 3월 10일 날 미국 비행기가 동경에 불을 질렀어요. 그때 일본은 나무로 만든 판잣집이 많았어요. 그래서 싹 다 타버렸어요.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갈라고 원서 내 놨는데 그날 저녁에 어머님이랑 누님 하나랑 누이들이랑 넷이 죽었어요. 아버지는 거기 계시다가 나와서 다시 못 들어가셔서 사셨어요. 비행기에서 수류탄을 수십 개씩 떨어뜨리는데 집에 그게 떨어졌어요. 일본은 강이 아니라 사람이 판 운하라서 그날 물이 다 말라버렸어요. 우리는 저수지 구덩이에서 살아서 나왔는데 아침에 사람이라고는 다 죽고 하나도 없었어요. 동경 시내서 그날 사람이 3분의 1이 다 탔다고 해요.
나는 한국에서 나고 한두 살 때 온 가족이 다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는데 그 일을 당하고 한해 더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내가 초등학교 졸업반이라, 14살이라. 일본에서 오사카에 시집을 가신 누님이 계셨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가지고 계신 돈을 누님한테 좀 드리고 간다고 거길 갔는데 사돈네가 절대로 우리를 못 가게 하는기라. 우리로 치면 중학교 같은 보통 고등학교를 일 년 동안 다니다가 해방되고 나서 15살에 한국에 왔어요.
그때 아버지가 날 은행원 시킨다고 주산을 가르치셔서 내가 와서 혜택을 많이 봤어요. 군대 가서 병참부대라고 보급부대에 들어가서 8년을 근무했어요. 주산을 잘 놨어. 중사로 제대하고 이장 짓을 몇 년하고.
일본에서 사망한 가족은 우리가 직접 화장해서 유골함에 모셨어요. 남동생 둘, 여동생 한명이랑 아버지랑 한국으로 들어와서 아무것도 없이 살았어요. 서하에 논이 좀 있었는데 아버지가 여자 하나 얻고는 다 날아갔어. 한 이년 살았어. 망하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여기 고향으로 온거야. 아무것도 없이 고향 들어와서 설움 구더기였지요.
나 스물네 살 때 결혼했지요. 부인은 열여덟. 말도 못 하게 고생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동생들만 있고. 그때는 논만 있으면 부잔데 아무것도 없었어. 하루 벌어서 하루 살고 반은 먹고 반은 굶고. 그때는 다 못 살았어요. 말도 못하게 배를 곯았어.
이승만이 농지개혁해서 그래도 먹고살게 된 거예요. 논 부치고 도지 줘야 되는데 논을 뺏었어. 이승만이 잘한 거 딱 두 개 있어요. 농지개혁이랑 반공포로 막 풀어준 거, 미군들 몰래. 그거 딱 두 개는 잘한 거예요.
그때만 해도 논 한마지기 하루 종일 일을 해도 품삯이 딱 깎아서 쌀 한 됫박. 그러니 부잣집은 자꾸 부자가 되고 없는 사람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식구들이 밥 조금 먹고 했어요. 논도 없으니 우리는 그런 혜택도 못 받았지만 그래도 남의 집에서 살면서 일 쌔가 빠지게 해주고 밥 얻어먹고 살았어요.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도 못해요.
우리 아들딸이 여섯인데 위로 딸 셋, 아들 셋인데 그것들 키울 때는 지금처럼 대출도 없어서 사채 썼어요 사채. 사채 얻어서 3부 이자를 내고 진주에 유학 보낸 아들딸 살림을 5년을 했어요.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애들이 공부를 잘하니까. 등록금도 안내고 장학금 받았어. 그래도 애들 학교 졸업할 때까지 빚이 있었지. 저 밑에 논에서 “아버지” 하면서 애들이 올라오면 반갑지만 걱정이 됐어요. 돈을 좀 줘서 보내야 되니까. 돈이 하나도 없으니 딴 부락 가서 사채를 내 와서 줬지요. 그렇게 공부 시켰어요.
나는 다른 부락 일은 잘 모르겠어요. 근데 다른 부락에는 군인이 경찰이 와서 사람들을 죽였대요. 우리 부락은 그런 것은 없었고 빨갱이가 그랬어요. 진실규명해도 보상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초상비도 못 받았어요. 그때는 개판이었어요. 초상도 부락민들이 해줬지요. 정부에서는 쌀 한 되도 안 줘요. 그때는 옳은 법이 아니었어요.
앞으로 이 동네는 사람이 없어서 버스도 안 올거예요. 우리 한 사십 명 있는데 80 넘은 사람이 70프로에요. 60인 사람 두 사람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제일 젊어요. 나는 아직 정신은 멀쩡해서 그날 일이 기억이 나요.
저희 아버지는 이도갑 입니다. 생년월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오십여섯쯤 되신 걸로 기억합니다. 어머님은 신필금 입니다. 생년월일은 기억나지 않고 한 오십쯤 될 때 그 일을 겪으신 걸로 압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아마 스물한 살쯤 됐을 거예요. 1950년인가 51년에 사건이 났어요. 6.25를 스무 살 때 겪었으니 51년이 맞겠네요.
그때 공비가, 그 당시에는 빨갱이라 했거든요. 6.25가 나기 전부터 부락에 자주 왕래를 했어요. 근데 6.25 이후 부락에 내려와서 이 동네 젊은 사람들이 공비 여자를 잡았어요. 그 다음날 와서 이장집 단장집 그리고 그 여자공비 잡은 사람 집에 불을 질렀어요. 그리고 공비 잡아준 사람을 동네 뒤에서 돌로 찧어서 다 죽여 버렸어요.
그 후에 한참 안 오더니 하룻저녁 와서는 소도 몰아가고 부락민을 많이 데리고 갔어요. 그때 우리 아버지가 잡혀간기라요. 그때가 음력으로 10월 7일이라. 눈비가 와서 약간 얼었을 때인데 내 아버지가 잡혀가서 나락을 짊어지고 기백산까지 갔다가 돌아가셨어요. 여럿이 갔는데 돌아온 사람도 있고 도망간 사람도 있고 갔다가 죽은 사람이 네댓이 돼요.
아침에 부락민이 올라가 보니까 아버지가 논에서 돌아가셔 있고 우리 백부가 그 조금 더 위에서 죽어 계시고 여기 근처 집 아들이 스물일곱 먹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그때 죽었어. 근데 그 사람들은 이번에 진상규명할 때 안 해서 이름이 없어요.
그날 올라가니께 아버지가 쭈그려 앉아서 죽어계시더라고요. 큰 아버지는 산 속 한참 안에 있고. 몇몇은 안 가려고 고집을 부리니까 거기서 죽이고 우리 아버지는 기백산까지 가셔서 짐을 내려주고 오다가 그 추운데 노인이 삼베만 입고 갔다가 얼어 죽었어요. 빨갱이들이 와서 사람들을 잡아서 자기들 사는 기백산까지 끌고 가는데 안 갈 수가 있나요. 가다가 도망 나온 사람도 있고 끝끝내 갔다가 살아 나온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나이 많은 동네 사람들은 거의 다 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살짝 피해서 온 사람도 많은데 우리 아버지는 양심가라서 꼬박꼬박 짊어지고 그 산에 올라갔다가 오는 길에 배가 너무 고프시고 추우니까 망개를 하나 잡숫더니 그 자리에 콱 주저앉아서 돌아가셨다고 해요.
빨갱이가 내려와서 동네를 싹 뒤져가지고 곡식 다 가져가고 숟가락이니 뭣이니 다 가져갔대요. 여자 하나가 따라서 내려와서 구석구석 다 뒤져서 가져갔다 해요. 그 여자는 여기 밑에 부락에서 빨갱이 나간 사람이었는데 여기를 잘 아니까 자연스레 자주 왔던 거예요. 그래가지고 소를 몰고 가던 사람도 고삐를 놓고 도망을 가고 해서 살 사람들은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기어코 갔다가 오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원래 여러 번 자주 왔었는데 그 뒤에는 빨갱이가 한 번도 안 왔어요. 따라가다 죽은 사람, 오다가 죽은 사람, 달려들다가 맞아 죽은 사람 그랬어요. 밤에 빨갱이가 와서 무조건 사람들을 잡아내면서 가자고 하는데 어디서 누가 데려가는지도 모르고 해서 나는 무조건 숨었지요. 무조건 도망가야 돼요. 아버지랑 그때 같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다 피하고 나이 많은 사람만 다 끌려갔어요.
그때 부락이 한 육십 몇 호 돼서 사람이 많았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부락민들이 끌려가서 안 온 사람들 다 찾을 때까지 기백산 꼭대기까지 뒤지고 올라갔어요.
그래서 한사람 빼고 시신을 다 찾아서 내려왔어요. 한 사람 그분은 살았나 죽었나 소식이 없어요. 그 사람은 자기 사촌 형이 민보단 이라는 조직에 부락 단장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빨갱이 오니까 피하라고 피신을 시키려고 하는데 이미 방에 빨갱이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빨갱이가 그 집에 불 지르고 잡혀가서 소식이 없어요. 죽었지요 뭐.
그날 많은 사람이 끌려 올라갔는데 살아나오고 마지막까지 다섯이 도망 못 가고 올라가서 세 명이 돌아가셨어요. 도북 위령비에는 우리 아버지 큰아버지 사촌 형님 세 분이 계시고 여기 다른 집은 신고를 못하고 조사를 못해서 못 올렸어요.
그 여자를 붙잡아버리니까 보복을 하러 내려 온 거예요. 그 여자를 잡은 사람은 돌로 찧어 죽였어요 마을 뒤에서. 집에 불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어요.
옛날에 특공대라는 게 있었는데 날마다 부락민들한테 밥 얻어먹고 잠만 자요. 보수도 없이 경찰 밑에서 있다가 부락민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하면서 있었는데 지켜주기는커녕 더 빨리 숨어버려요. 빨갱이가 오면. 사찰 유격대라고 빨갱이 하다가 자수한 사람들 군부대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한테는 옷도 좋은 것 주고 총도 좋은 것 주고 대우도 잘해줬어요. 완전 A급으로요. 더 세요, 잘 잡고. 특공대는 아무 힘도 없었어요. 그런데 부락에서 밥은 해줘야 되고...
빨갱이도 와서 털어가기만 하고 크게 나쁜 짓은 안 했는데 신고를 하고 잡아주고 하는 바람에. 그전에 민보 단장이 우리 사촌형님인 이달주였는데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때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라서 나랑 아버지랑 밤에 갔는데 죽어 있었어. 이장은 도망가고 때려죽인 사람, 총에 맞은 사람 그랬어.
그분은 위령탑에 이름이 안 올라갔어요. 남의 집에 양자로 갔는데 정식 호적이 안 올라가서 결국 이름도 못 올렸어요. 내가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안 해주니 그냥 개죽음이지요 뭐.
나는 동경에서 공부를 했어요. 해방되는 해 3월 10일 날 미국 비행기가 동경에 불을 질렀어요. 그때 일본은 나무로 만든 판잣집이 많았어요. 그래서 싹 다 타버렸어요.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갈라고 원서 내 놨는데 그날 저녁에 어머님이랑 누님 하나랑 누이들이랑 넷이 죽었어요. 아버지는 거기 계시다가 나와서 다시 못 들어가셔서 사셨어요. 비행기에서 수류탄을 수십 개씩 떨어뜨리는데 집에 그게 떨어졌어요. 일본은 강이 아니라 사람이 판 운하라서 그날 물이 다 말라버렸어요. 우리는 저수지 구덩이에서 살아서 나왔는데 아침에 사람이라고는 다 죽고 하나도 없었어요. 동경 시내서 그날 사람이 3분의 1이 다 탔다고 해요.
나는 한국에서 나고 한두 살 때 온 가족이 다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는데 그 일을 당하고 한해 더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내가 초등학교 졸업반이라, 14살이라. 일본에서 오사카에 시집을 가신 누님이 계셨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가지고 계신 돈을 누님한테 좀 드리고 간다고 거길 갔는데 사돈네가 절대로 우리를 못 가게 하는기라. 우리로 치면 중학교 같은 보통 고등학교를 일 년 동안 다니다가 해방되고 나서 15살에 한국에 왔어요.
그때 아버지가 날 은행원 시킨다고 주산을 가르치셔서 내가 와서 혜택을 많이 봤어요. 군대 가서 병참부대라고 보급부대에 들어가서 8년을 근무했어요. 주산을 잘 놨어. 중사로 제대하고 이장 짓을 몇 년하고.
일본에서 사망한 가족은 우리가 직접 화장해서 유골함에 모셨어요. 남동생 둘, 여동생 한명이랑 아버지랑 한국으로 들어와서 아무것도 없이 살았어요. 서하에 논이 좀 있었는데 아버지가 여자 하나 얻고는 다 날아갔어. 한 이년 살았어. 망하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여기 고향으로 온거야. 아무것도 없이 고향 들어와서 설움 구더기였지요.
나 스물네 살 때 결혼했지요. 부인은 열여덟. 말도 못 하게 고생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동생들만 있고. 그때는 논만 있으면 부잔데 아무것도 없었어. 하루 벌어서 하루 살고 반은 먹고 반은 굶고. 그때는 다 못 살았어요. 말도 못하게 배를 곯았어.
이승만이 농지개혁해서 그래도 먹고살게 된 거예요. 논 부치고 도지 줘야 되는데 논을 뺏었어. 이승만이 잘한 거 딱 두 개 있어요. 농지개혁이랑 반공포로 막 풀어준 거, 미군들 몰래. 그거 딱 두 개는 잘한 거예요.
그때만 해도 논 한마지기 하루 종일 일을 해도 품삯이 딱 깎아서 쌀 한 됫박. 그러니 부잣집은 자꾸 부자가 되고 없는 사람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식구들이 밥 조금 먹고 했어요. 논도 없으니 우리는 그런 혜택도 못 받았지만 그래도 남의 집에서 살면서 일 쌔가 빠지게 해주고 밥 얻어먹고 살았어요.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도 못해요.
우리 아들딸이 여섯인데 위로 딸 셋, 아들 셋인데 그것들 키울 때는 지금처럼 대출도 없어서 사채 썼어요 사채. 사채 얻어서 3부 이자를 내고 진주에 유학 보낸 아들딸 살림을 5년을 했어요.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애들이 공부를 잘하니까. 등록금도 안내고 장학금 받았어. 그래도 애들 학교 졸업할 때까지 빚이 있었지. 저 밑에 논에서 “아버지” 하면서 애들이 올라오면 반갑지만 걱정이 됐어요. 돈을 좀 줘서 보내야 되니까. 돈이 하나도 없으니 딴 부락 가서 사채를 내 와서 줬지요. 그렇게 공부 시켰어요.
나는 다른 부락 일은 잘 모르겠어요. 근데 다른 부락에는 군인이 경찰이 와서 사람들을 죽였대요. 우리 부락은 그런 것은 없었고 빨갱이가 그랬어요. 진실규명해도 보상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초상비도 못 받았어요. 그때는 개판이었어요. 초상도 부락민들이 해줬지요. 정부에서는 쌀 한 되도 안 줘요. 그때는 옳은 법이 아니었어요.
앞으로 이 동네는 사람이 없어서 버스도 안 올거예요. 우리 한 사십 명 있는데 80 넘은 사람이 70프로에요. 60인 사람 두 사람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제일 젊어요. 나는 아직 정신은 멀쩡해서 그날 일이 기억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