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자 인터뷰

김상록 유족 구술

작성일
2025-08-19 15:44:48
조회수 :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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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때 내 나이 일곱 살이었는데 저쪽에 어름 터라고 있어. 쑥밭재
처음에 이 사건이 김종훈이 부대라고 그랬어.
그런데 하룻저녁 군인들이 쑥밭재에서 내려와서 밥을 시켜 먹고 잘 갔어. 그 이튿날 저녁에 군인들이 또 와서 밥을 해 달라고 해서 또 밥을 해 줬어.
그때만 해도 내가 7살 먹고 째깐하니까 부엌에 엄마 밥하는데 나무 꺾어서 불도 넣어주고 군인들은 그 먼 쑥밭에서 내리 오니까 피곤해서 정지 바닥에 막 다리 뻗치고 드러누워서 자는 사람도 있고 그랬어.
그 후에 밥 잘 먹고 가는가 싶었는데 동네 사람들 한 곳에다가 모집을 시키고 움직이지를 못하게 해 놓고 장롱에 든 돈 이런 거 구둣발로 차서 장롱 문을 다 부수고 가져가고 그놈들이 살인강도 짓을 했어.
그리고 그 이튿날 아침에 우리 동네에서 청년 열한 명을 데리고 가면서 온 동네 불을 다 질러버렸어. 전부 다 안 탄 집이 몇 집 없이 다 태웠어.
내가 여기 뒷집서 나서 80년을 살아온 사람인데 세상에 그 무작스런 놈들이 소 마구에 소가 버젓이 살아있고 한데 거기다가 불을 지르고 일곱 살 먹은 것이 소끌베이 풀라고 보니 힘이 모자라서 못 끄르고 있으니 군인이 총 끄트머리에 칼 달려 있는 걸로 탁 끊어 주더라고.
내가 군대 생활하면서 총 끄트머리 칼만 쳐다보면 그 생각이 떠올라.
지붕이 불에 타니까 소가 안 나오려고 해. 원래 소들이 그렇다고 해. 그래 겨우 몰아서 여기 이 집터가 내가 20년 전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원래는 공터였어. 텃밭. 내가 이리 소를 몰아서 소끌베이를 거머쥐고 울고...
아버지 얘기하면 나는 눈물이 나서 말을 못해.
그래가지고 청년들을 싹 잡아서 등구로 갔어. 등구 가면서 거기 또 열 명을 청년들을 잡아다가 오도재를 넘어가지고 함양으로 해서 부산 형무소에 갖다 넣었어.
죄 없는 민간인을 잡아다가 즈그가 뭔 성과를 올릴라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은 그렇게 무작스런 짓을 하고 형무소에 갖다 여 넣고 수사를 받는 거라.
“너 빨갱이 짓 했지?” 한게 없는데 “안 했습니다”
안했다고 하면 더 뚜들겨 패. 강제 항복을 시키는 기라. 그래가지고 매에 못 이겨서 나중에는 “했습니다” 하면 “무슨 빨갱이 짓 했노?”
한 게 없으니 알 수가 있나, 그래서 또 “모릅니다” 하면 “이놈이 금방 했다고 해놓고 또 안 했다 한다” 고 또 두들겨 패고.
즈그는 분명히 뻔하게 안 한걸 알면서도 개 패듯이 패서 쓰러져 죽으면 그 차가운 겨울에 한쪽 구석에 부들 트려 놓으면 죽어 삐리고, 또 죽어 삐리고 많이 파묻는 날은 한 번에 여덟 명도 한 구덩이에 가져다 파묻고 적게 죽은 날은 네 명도 한 번에 파묻고 열두 명도 하고.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패 죽여 놓고 묻어 놓곤 주소에 따라서 자기 집으로 편지를 보낸 거라. 김 아무개는 아파서 병으로 죽었다. 하고 부산 시장 명의로 편지를 보냈는데.
생각을 해보시오. 뭣을 한다고 부산형무소에까지 가서 아파서 죽을끼요. 그런 무작한 놈들이 정치라 카는데 사람 하나 때문에 민간인 수천명을...
빨갱이는 사람 안 죽였어요. 나는 대통령이 와도 사실대로 이야기해. 빨갱이가 왜 사람을 쥑여. 사람 절대로 안죽여. 여기 와서 식량이랑 소 돼지 약탈해 갔지 절대로 사람 하나도 안 죽였어요.
사람을 죽인 것은 우리 아군이 다 학살한 거라. 학살을. 다 학살당한 거라. 그 개 패듯이 두들겨 패서 죽이는 게 학살이지 그게 아니면 뭐 이여.
여기 위령탑 비 세우는 데도 내가 학살이라고 하니까 학살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희생자라고.
참 말도 안 되지 내가 더러버서 거길 가지를 않았어. 즈그 좋토록 즈그 맘대로... 학살이 학살이지 그게 뭐이라. 학살을 당했으면 학살이라고 해야 되지 왜 희생자라고 해. 양민 학살 희생자 이렇게 되어야지. 학살이 먼저 들어가야지. 희생이야 필히 따라 들어가는 거고 학살이 먼저 들어가야지. 내가 일곱 살이었는데 죽은 날도 제삿날도 몰랐어.
저 윗집에 김명포 라는 분하고 자기 아들하고 그 집에는 둘이 가고 임점돌 이라는 분도 두 형제간이 잡혀가고 그 당시 열일곱 먹은 사람이 있었는데 니가 무슨 죄가 있것니, 너는 느그집에 가거라 해서 보내줘서 그분이 살아 돌아왔어. 고기 와서 아무개는 며칟날 죽고 아무개는 며칟날 죽고 그 사람이 제 눈으로 봤으니까 그 사람이 와서 기억해 줬다가 살아 돌아와서 알려줘서 그 날짜로 제사를 음력에 맞춰 이월 초엿세 날을 우리 아버지 제사로 지내.
그 사람이 여기 돌아와서 마천 지서 터에 살았었는데 얼마 못 살고... 맞긴 많이 맞아도 일본 말로 운동장에 모두 세워놓고 김석우를 불러냈어. 불러내서 하는 말이 일본 말로 “이 세상에는 억울한 일도 많단다” 그라더라 케. 글 쿠면 알아듣는 소리 아이요.
그게 너네 억울하게 죽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자기 내색을 한 거라. 참 한심해서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때 어르신 아버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그 당시에 우리 아버지가 45세 네. 45세.

마을에서 끌려가신 분이 몇 분이나 되신가요?
열한 명. 등구가 열 명인데 연고 없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뒤에 후손이 없는 사람이 하나 있어.
추성에서 열한 명 등구에서 열명 마천서 스물한 명.
한날한시에 끌려갔어.

끌려간 그 날짜가 언제인가요?
1950년... 우리는 그때 음력을 샜으니까 동짓달 초아흐레.
그럼 그전에는 북한군이 내려와서 먹을 것을 요구하기만 했나요?
총을 갖다 들이대는데 식량을 안 줄 수가 있나. 빨갱이는 먹을 것만 탈취해 갔지 사람은 하나도 안 죽였어.
그 당시에 쬐깐한 내가 들었을 적엔 김종훈이 부대라 소리만 들었어. 우리나라 김종훈이 부대가 그랬다 하는 소리만 들었제. 어른들이 그래쌌터라꼬. 그때는 내가 어려서 그게 뭔지 알 수가 있어야제.

어르신 형제분은 어떻게 되시나요?
내 형제는 단둘인데 남동생 하나 있고.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
우리 집에 딸은 안 돼. 우리 누나 17살 묵어 죽고 여동생도 경기 나서 죽고, 그래서 우리 집에 딸은 안 돼.

그 당시 아버님의 형제 분들도 이곳에 계셨나요?
작은 아버지가 한 분 계셨는데 저기 벽송사라고 있어. 벽송사 절에 열세 살에 중질 하러 올라간기라.
그때는 대처승이라고 마누라 있는 스님이 있었어. 그래서 평생 잘 사시다가 제 나이에 돌아가셨어.
어르신은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떻게 사셨어요?
어머님은 개가 하고 작은아버지한테 우리 두 형제가 컸지.
내가 지금 열여섯 살 먹는 사람보고 소 쟁기질 하라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것소, 아무도 없어. 근데 나는 그 나이에 다 했어. 소 부리고 농사 다 짓고 그랬어요.
작은아버지 밑에 있다가 결혼하면서 분가해서 나왔어.
아들 삼남 이녀 두고.

아버님 시신은 찾으셨나요?
시신은 못 찾고 그때 부산 형무소에서 사람 패 쥑여 놓고 각처에 편지를 보낸 거라. 이 사람 아파서 죽었으니 시체를 찾아 가거라 하고.
그래 작은 아버지가 가니까 한 구덩이에 누구누구누구 이름을 써서 여기 있으니 찾아가라 하는데 뒤섞여 놓으니 찾을 수가 있어야지.
우리 아버지는 손등에 새까만 점이 있었는데 그 점을 보고 찾았다 캐.
찾아서 가져 오도 못하는 기고. 지금 같으면 얼마든지 화장을 해서 가져왔을 건데 그 당시만 해도 차가 있나 저 부산 한번 갈라 하면 새벽밥 먹고 가서 차 타면 저녁에 가서 내리고 그랬을 때라. 그때가 그런 시절이라. 찾아서 가져오지도 못하는 거고 그냥 옆에다 묘를 쓰고 잘쪽한 돌을 앞에다가 하나 표시로 세워서 꽂아놨었는데 그래놓고는 나 한번 데리고 가서 보여준다 하더만은 생전 형편이 곤란하고 하니까 데려가지도 못하고 해서 다 실묘 돼버린 거라. 그때 다 그랬어.

사건이 있던 날은 일상생활을 하시던 중 갑자기 끌려가게 되신 건가요?
시골에는 옛날에 사랑방이 있어요.
사랑방에서 농사짓는데 보리 심어놓고 오줌 구시라고 큰 나무로 구시를 파놓고 소변을 거기다 받아서 장군으로 지어다가 보리밭에 소변을 줘서 농사를 지어 먹고 그랬어 그 시절에는.
그래서 소변 많이 보라고 무시를 동치미 담아서 먹으라고 해서 주면 먹고.
사랑방에 모여앉아서 새끼를 꼬고 망태도 만들고 짚으로 공예를 많이 했어.
뺑 둘러 앉아서 새끼를 꼬고 있는데 갑작시리 문을 확 열고 덮친 거라.
너거 전부 반동분자 아니냐고.
그 생사람을 잡은 거라 생사람을.
새끼 꼬고 있던 열한 명 몽땅 다 잡아가고 살아온 사람은 그 한 사람 밖에 없어. 나이가 젤로 어린 사람. 뭔 죄가 있것냐 하면서 살려 보내주더라 캐.

그 어르신도 연세가 많으시니 이제 돌아가셨겠네요?
아이가, 많이 뚜드려 맞아놓으니 와서 몇 달 못 살고 골병이 들어서 죽었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있으세요?
사랑받았다기 보다 세상천지 모르고 컸지요 뭐.

사건 후 동네분들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청년들 잡아가면서 집집마다 불을 다 질러버렸어요. 태워버려서 이사를 간 거지.
올라오다 보면 보이는 부락들마다 여기가 산 밑이 돼서 적군이 많이 올라온다고 해서 다 이주를 시켜버렸어. 금계 도마 안봉 마천 전부다 뿔뿔이 흩어져서 이사 다 갔어.
집을 다 태워서 없는데 어떻게 살것어. 죽일 놈들이 못된 짓만 가려가면서 했어.
이거 원칙은 국가가 보상을 싹 해줘야 돼.
제주 4.3 사건도 같은 맥락이고 광주도 학살한 거 아닙니까. 그 당시 마천이나 우리도 따지고 보면 다 같은 맥락이라.
근데 여기 국회의원들은 하나도 해낸 게 없어. 국회의원들이 서들어서 해야 되는 건데 거창은 다 했을거여.

그 당시 여기는 몇 가구가 살았나요?
한 서른 호 정도 있었어.

이주 후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신 계기가 있으실까요?
한 몇 년 있었을끼라. 불타고 우리는 금계 부락으로 갔다가 이삼 년 있었어 거기. 할머니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가 모시고 마천소재지로 갔는데 어머니 개가하고 산림을 포개야 될 거 아이가. 나하고 동생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 있다가 지금은 작은 아버지가 팔아먹고 없지만 올라오는 길에 빨간 다리 있는 곳이 우리 땅이 있었어.
거기서 내가 열세 살 먹을 때 할무이 할아버지 밥상 차려서 모셨어. 그래서 내가 15년 동안 혼자 밥해먹고 해도 아직도 밥은 잘해. 열 세살부터 밥해묵기 시작했는데.
혼자 외롭게 살라는 사주팔자야 내가.
내가 죽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아버지 명예회복하고 잘 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하는 그 생각하면 내가 죽어서는 안되겠구나 싶고.
어머니 개가 하시고 작은아버지 집으로 갔는데 내가 남의 집에서 살기가 그러니까 여기 움막을 치고 나무를 베어다가 포개서 간단하게 비나 안 새고 누울 수 있게 집을 지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하고 나하고 살았어. 내가 밥 해드리고. 그 후에 복구가 완전히 되고 나서 이 동네로 와서 빨리빨리 자기 집터에 사람들이 집을 지어서 살게 된 거지.
그때 지은 집이 이 밑에 한 채랑 서너 채 집을 지었어.
요기, 이 집터가 아버지 재산이라. 83평인데. 내가 내 손으로 집을 지었지. 내가 57살에. 자그맣게 한옥처럼 지어서 살려고 했는데 우리 할마씨가 민박도 하고 하자고 쌔워서 크게 지어놨는데 고마 2년 만인가 3년 만인가 할마씨 죽어버리고.
사랑방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동네에서 사람들 움직임은 어땠나요?
잡혀가고 그 이튿날인가 동네서 그 열일곱 살 인가 하는 그 사람 큰형님이 서들어 가지고 여기서 소를 한 마리 잡아서 짊어지고 저 오도재까지 따라간기라.
그것만 주고 소용이 있는가. 중간에 즈그 받아 묵고 사람은 안 돌려 보내주고.
아무 죄도 없고 죄라고는 괭이로 땅 파서 모심고 콩 심고 해서 농사짓고 산 게 죄다. 그거뿐이거든 사실.
빨갱이 했냐고 하면 안 했다 하면 뚜들겨 패고 매에 못 이겨서 했다 하면 뭐 했냐고 담당이 뭐냐고 하고 한 게 없어서 모른다 하면 더 뚜들겨 패. 그럼 뭐라 말해야 되것소. 사람 뚜들겨 패고 사람이 그 추운데 죽여서 하나둘도 아니고 여러 수십 명을 한 무디기에 파묻어버리고.

그 분들 잡혀 가실 때는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해서 그냥 기다리셨나요?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차가 있나 파출소고 뭐고 다 한통속인데. 그 생사람을 죄인 아닌 죄인을 만들어서 죽였으니 그놈들도 다 죽었어야 되는데 양심선언도 안 해. 그 놈에 자슥이. 지금도 어디 살아있을 란지도 몰라.
양심선언이라도 하면 얼굴 꼬라지 보고 확 찔러 죽일까 싶어서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사람을 그리 많이 죽였는데 겁이 날거라. 그 죄가 어디 가겠어.
내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내 눈에 보이면 그놈 죽여버리지 그걸 놔두겠어.

병으로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며칠 만에 왔나요?
그건 몰라요.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을 낀데 참,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부산시장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어.
거짓말을 해도 참.
다 죽여야 돼 그놈들. 내가 얼마나 억울하면은 솔직히 태극기를 안달아.
국가가 백성을 죽이는건 원수지간이나 하는 짓 아니요. 백성을 다 때려죽이고 지 혼자 잘 되려는 나라에 태극기를 머 한다고 꼽을 끼고.
내가 명예 회복시키고 보상 싹 해주면 반만이라도 풀리면 꼽을라나 몰라도. 내가 태극기는 사 놨어. 우리 아들이 태극기를 달지. 우리 아들이 달아놓은 태극기를 내가 달지 말란 소리는 못하니 달지 말란 소리는 안 하지. 못이기는 척 하지만 내손으로는 안달아.
나는 그런 자존심은 있어.
나라가 백성을 존중하고 해야 잘 되는 거지.
지금 세상에야 예를 들어서 대통령이 자기 맘대로 사람을 죽이고 어쨌어 봐 그걸 그냥 놔두겠어? 지금 세상에는.
동네에 이 사건을 기억하시거나 같이 얘기를 나누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없어. 다 죽었어요. 살아있어도 나만침 똑똑히 들은 사람은 없어. 위에서 전해들은 얘기를 아는 거지.
나한테 그 살아오신 분이 “동생 이 다음에 내가 한말이 쓰일는지 모르니까 잘 들어놓게” 하면서 그 얘기를 하더라고.
일본 말로 “니가 뭔 죄가 있나 이 세상에는 억울한 일도 많단다, 그 말을 꼭 귀담아 두게” 나한테 그러더라고.
그러니 즈그들도 억울하게 사람들이 죽은 걸 알아. 맞아죽은걸 알아. 즈그도 사람인데 그걸 모를 택이 있나.
내가 이거 조사할라고 김영삼 대통령 때 탄원서를 올렸어. 대통령한테.
물론 대통령이 이런 거를 다 읽어볼 수는 없겠지.
이게 민원실에서 다 빠꾸를 시킨 거라.
답변이 오기를 국방부로 가서 물어봐라 해서 국방부로 다시 탄원서를 올렸어.
국방부에서는 뭐라고 답변이 왔냐고 하면은 부산 정부합동 문서창고가 있으니 거기 가서 알아봐라 이러는 거라.
그래서 부산을 갔어. 사람을 하나 사서.
그 당시 서류는 다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나는 학교도 못 가고 했는데 그걸 어찌 알겠어.
그래서 한문 잘하는 사람을 돈 주고 20만원 주고 사서 데리고 갔어.
가니까 뭐라카냐 하면 박정희 대통령 때 서류 다 불태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안 보여줘.
우리 같은 사람이 가면 안 보여줘. 이걸 명예회복을 위해 조사를 했잖아요. 먼저 우리 같은 사람들 조사를 할 때 그 감독관들이 가서 보자고 하니까 안 보여 주고 되겠어? 그때 문서를 보고 이 사람들 명예 회복시켜야 된다고 해서 명예 회복이 된 거라.
그 일 이후에 작은아버지 댁에 사실 때 이야기를 조금 해주시겠어요?
농사 지었어요.
학교를 가기는 갔는데 내 명칭이 있어요. 학교 하루 가고 집안일 하루하고 하느라 내 별명이 하루 걸이였어. 선생님이 하루걸이라 이름을 지었어.
공부만 해도 모자랄 판에 그랬으니 내가 뭘 배웠겠어. 맨날 공부를 디다봐도 잘하니 못하니 하는데. 기초를 잘 배웠어야 될 때 학교를 못 갔으니까 몰라 아무것도. 그래도 하루걸이한테 졸업장을 주긴 주대. 중학교 갈 형편은 못되고.
내 사촌동생들이 팔 남매라서 전부 내가 내 등허리로 업어서 다 키우고 농사도 짓고. 시골농사 아홉마지기라 카면 일거리가 너무 많아요. 열여섯 살
먹는 내가 그 일을 다 했어요. 머슴 하나 데리고 농사를 짓고 했는데. 작은 아버지는 스님이고. 전부 내가 알아서 다 하고.
할아버지가 손부나 보고 죽는다고 결혼하라고 환장을 하네. 스물일곱쯤에나 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나 어서 결혼을 하라고 부탁해서 스무살에 결혼을 했어. 결혼해가꼬 아 하나 놓고 1964년 11월24일 내가 입대를 해서 4년간 군대생활하고 와서 분가하는데 내 혼자 대구 갔어. 돈 번다고. 목수일 배워서 평생 목수로 살다가 인자 하도 못하고. 매듭을 지을 나이가 됐어.
밥맛도 모르고 설치고 댕겼어요. 어찌됐든 먹고 살아야 되니까. 애들도 있고.

자녀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나요?
아니요 해줘도 몰라요. 해줄 필요도 없고.
큰아들이 지금 육십이에요. 내가 장가를 일찍 갔더니만. 할아버지가 손부봐야 된다고 일찍 결혼했더만 증손 봐야된다고 해서 보고, 원없이 다 했구
만. 당시 79살, 이 동네에서는 상노인이었어요.
아 놓고 두 달인가 석달 만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내가 결혼을 일찍 했어.
스무살차이라. 우리 큰아들이 육십이라.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뭘 어찌해서 먹고살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물려줄것도 없어.
나는 태어나서 아버지 잃고 나서 계속 그때부터 내가 벌어 내가 먹고 산 택이지. 내 사주팔자가 외로울 고자가 들었어. 외롭다 그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