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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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적 여건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연봉에 둘러싸여 산세가 험하고 깊어서 공비들이 은거하기에 알맞아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일부 반란군이 소백산맥의 줄기를 따라 피신하다 지리산과 덕유산에 본거지를 두게 되었다. 6.25전쟁 당시 국군의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북한군 6, 7, 9사단 병들이 기존 공비들과 지리산, 덕유산에서 합세하여 활동함으로 인하여 피해는 더욱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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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이전 피해사항정부에서는 1948년 10월말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여 남북지구로 구분 지리산과 덕유산의 공비작전을 펴나갔으나, 함양군 민가에 최초로 반란군 공비가 나타난 곳은 1949년 1월 서하면 봉전마을이며, 1949년 초반기에는 정일권(T-樓)준장을 사령관으로 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가 계속하여 반란공비 토벌작전을 전개 하였으나 반란군이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공격이 맹렬하였고 또한 38선의 위험이 가중되어 대부분의 병력이 철수하자 반란군의 난동은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1949년 3월에는 김지회와 홍순석이 지휘하는 500여명의 지리산 공비는 덕유산으로 이동하여 거창일대에서 난동을 벌렸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에서는 공비대선멸작전을 전개하여 백운산, 장안산, 덕유산 등지에 주로 접촉가능성이 많은 민간인을 공비와 격리시켰다. 본 과정에서 발생한 주민 피해 등이 수동도북사건, 치라골사건, 안의 유동사건 등 보도 연맹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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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당시 피해사항6.25전쟁 발발이후 1개월 후인 1950년 7월 26일 북한군 7사단이 장수를 거쳐 육십령을 넘었다. 경비중인 군경부대와 혈전을 벌렸으나 막아 낼 힘이 없어 밀리고 말았다. 사실 함양은 여순사건 이후 공비과 싸워왔고, 그 공비가 거의 전멸되려는 시기에 남침 전란으로 완전이 그들의 치하에 들게 되었으니 보복 행위가 각 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9.23일 북한 인민군이 진주에서 후퇴하면서 경찰서 등에 구금되어 있는 우익인사들을 철선으로 묶고 두 사람씩 엮어서 연행하여 지곡면과 서하면의 경계인 대황령 고갯길로 향했다. 대황령에서 우익인사 부지기수를 처형하고(375명 정도), 퇴진을 계속했다. 때는 마침 추석절이었다. 퇴진하는 북한군은 주민들에게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전상 이동이라고 하며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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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비 토벌작전 당시 피해사항이상현이 이끄는 당시의 잔존 공비 약 200명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파유격대원과 합류하여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유엔군의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잃고 고립된 호남지방의 북한군 제6,7,9사단의 잔병과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지에 분산하여 유격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 12월경에 공비는 약 2만여 명으로 추정되었으며, 초기의 잠복기를 벗어나 점차 활동상이 눈에 띄게 현저하였다. 이에 대해 1951년 2월부터 아군의 제8,11사단이 지리산 구역 내 내통분자 격리 작전을 전개하여 이른바 빨치산선별작전을 펼쳐 나갔다. 이러한 작전이 계속되던 중 방곡양민학살사건, 서주학살사건, 거창신원양민학살사건 등이 발생했다.
본격적 공비소탕 작전 당시
대표적 사례로서 육군11사단 9연대 3대대(대대장 한동석)가 1951. 2. 7일 산청군 수철리에서 야영을 하고, 산청군 가현·방곡·자혜·점촌, 유림면 서주 등의 마을을 거쳐 오면서 1951. 2. 8일 산청군 가현·방곡·점촌마을 주민 312명을 학살하고, 가옥 141채를 불태웠으며, 산청군 자혜·화계·화산·주상 그리고 함양군 유림면 손곡·지곡 주민 700여명을 유림면 서주 다리 및 삼각 자갈밭에 집결 시킨 후 통비분자를 분류하여 217명을 집단 총살시켰다. 당시 유림면 주민은 47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본부대는 2. 8일 생초국민학교에서 야영을 하고 거창 방면으로 향했다. 2. 9일 산악에서 야영한 부대는 2. 10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부락에 도착했다. 본 마을에서 70여명의 주민 학살이 거창 신원 사건의 시발이 되었다. 상기 사항 이외에 지역 빨치산 소탕을 위한 지역 주민의 피해 또한 다양했다. 1951년 5월 백전면 백운리 주민 12명 행불, 1951년 10월 안의면 장수사 방화사건, 1951년 춘기 서상면 영각사 방화사건, 1951년 5월과 1952년 2월 엄천지구 5개리 가옥전소 사건 등이 있다.
- 공비 토벌작전 당시 피해사항이상현이 이끄는 당시의 잔존 공비 약 200명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파유격대원과 합류하여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유엔군의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잃고 고립된 호남지방의 북한군 제6,7,9사단의 잔병과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지에 분산하여 유격활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 12월경에 공비는 약 2만여 명으로 추정되었으며, 초기의 잠복기를 벗어나 점차 활동상이 눈에 띄게 현저하였다. 이에 대해 1951년 2월부터 아군의 제8,11사단이 지리산 구역 내 내통분자 격리 작전을 전개하여 이른바 빨치산선별작전을 펼쳐 나갔다. 이러한 작전이 계속되던 중 방곡양민학살사건, 서주학살사건, 거창신원양민학살사건 등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