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 역대군수 - 조선시대 (함양)
송희경
  • 1422~ 1425
  • 금산군수로 있으면서 아전 2명이 죽었는데 감사가 보고하자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하여 감찰관이 조사하여 보니 장으로 때려 죽은것이 판명되어 파직되었다.
최덕지(崔德之)
  • 1425 ~ ?
  • 벼슬이 직제학이고 덕행이있어 영암록동서원에 배향
채 륜(蔡 倫)
권자홍(權自弘)
  • 1440년경
  • 문종대왕이 세자로 있을시 세자빈이던 현덕왕후(단종의 생모) 권씨가 죽자 장례의 모든일을 맡아서
    처리하였으며 후일 단종 복위를 도모 하다가 처형 되었다 .
정양(鄭穰)
  • 1441년경
이보흠(李甫欽)
  • 1448년경
  •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금성대군과 단종 복 위를 도모하다가 박천으로 유배 후 참형되었다.
  •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정조때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거창의 덕천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조상치(趙尙治)
  • 증광문과에 장원하였고 세종·문종·단종의 세 왕을 섬겨 성삼문·박팽년과 함께 총애를 받았다.
  • 세조의 왕위 찬탈 뒤 예조참판에 임명 되었으나, 사양하고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지냈다.
  • 임종때 자기의 시문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정종소(鄭宗韶)
  • 성균관 사성에 올랐으나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김종직은 오천의 정선생이라 불렀다 한다.
신자교(申子橋)
  • 1460년경
  • 함양성 문루(제운루)를 중수하고 사촌동생인 신숙주로 하여금 기문을 짓게 하였으며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였다.
노신경(盧藎卿)
  • 1466년경
  • 파직되었다가 환임하였으며 왕이 이름을 선경(善卿)으로 하사 하였다.
박수미(朴壽彌)
  • 1470년경
김종직(金宗直)
  • 1470.12.28~1475.12.28
  • 호는 점필재(占畢齋)이며 조선초 도학의 거유로 영남 학파의 종조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세조 5년 문과에 급제 하였고 1471년 함양군수 재임시는 백성들의 차세를 감면 관영 차밭을 조성했으며 매년 짚으로 이던 함양성담을 기와로 바꿔 부역을 덜어주었으며 학교를 진흥 육성하여 학문의 꽃을 피웠다. 정여창, 김굉필 같은 도학의 거유와 유호인, 조위, 김일손, 남효온등 문장의 명사를 많이 배출했고 주민들의 풍속을 바로잡아 교화에 힘써서 백성을 편안하게 했으니 군민이 추모하여 생사(生祠)를 세웠으며 현종때에 백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 당후일기등이 있다.
여충보(呂忠輔)
  • 1476~1481
  • 뇌계 유호인 선생이 여충보의 명의로 함양의 3성씨에 대하여 족보서를 썼다.
최한후(崔漢候)
  • 1482~1486
  • 농업을 권장하고 학문을 진흥시켰고 만년에 도승지를 끝으로 사직하고 유림면 지곡에 정착하여 함허정을 짓고 소요자적하였으며 1511년 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 강서시파의 교본인 황산곡집을 발간하였다.
조 위(曺 偉)
  • 1486~ 1489
  •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시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자 함양군수로 봉직하게 되었고 부친상으로 사직하였다 다시 도승지, 호조참판을 거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하던중 강을 건너면 처단하라는 왕명이 내렸으나 대신들이 간하여 처형은 면하고 장형을 받고 의주. 순천으로 유배생활을 하던중 죽었다. 숙종때 문장공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현재까지 선생의 호를 딴 매계백일장 이 매년 김천 문화원에서 열리고 있다.
김준손(金駿孫)
  • 1493~1496
  • 탁영 김일손의 형으로 홍문과 교리로 있으면서 과거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
  • 함양군수로 있을시에는 청렴하다는 관찰사의 보고로 한 등급 승진하였으나 모친 병환으로 사직 하였다. 홍문과 직제학을 지내던중 무오사화로 동생 김일손이 화를 입게 되자 호남으로 유배가 내려졌는데 유배지에서도 연산군의 실정상소를 계속 올렸으며 중종반정시 신원이 복원되어 연천군에 봉해졌고 연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잠(李 箴)
  • 1487~1501
최연손(崔連孫)
  • 1502~1507
  • 전임 군수 최덕지의 증손으로 둘째 아들의 장모집이 함양에 있었으나 가난하였는데 임기중 부자집으로 만들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 전임 최한후 군수가 만들어놓은 황산곡집 책판을 선비들이 자꾸 인쇄하여 달라고 조르자 책판을 불태워 버렸다.
김 대(金 對)
이충걸(李忠傑)
  • 1512년경
  • 남해 사람으로 젊었을적에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어느 고을 방백이 진주에 현첩을 바치러 왔다가 충걸을 만나 배웠다는 글을 외우도록 하니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방백은 기특하여 그의 신분을 벗겨주고 배움에 힘쓰도록 하니 나중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조참(趙參)
  • 1513~
김식(金湜)
  • 1518년경
  • 몸이 약하여 체직상소를 사헌부에서 올렸으나 중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문계창(文繼昌)
  • 1519년경
  • 제주목사에서 함양군수로 부임하였고 풍기군수로 이임되어 근무중 사망하였다.
  • 간신배 이항(李沆)이 경상좌도 감사에서 대사헌으로 임명되어 갈 때 시를지어 송별하였다.
정효순
  • 1520년경
  • 진주시 대평면에 족정(足亭)을 건립하였다.
김응상(金應祥)
김윤석(金允碩)
  • 1543년경
  • 퇴계 이황 선생이 방문하여 시를지어 증정하였다.
금원복(琴元福)
  • 1544년경
  • 재해발생에 따른 검사가 어긋나 파직되었다.
성몽열(成夢說)
  • 1545년경
서구연(徐九淵)
  • 1550년경
  • 남계서원 건립을 지원하였다.
윤 확(尹 確)
  • 1559~1563
  • 남계서원 사당건립을 지원하였다.
김우홍(金宇弘)
  • 1564~1568
  • 남계서원의 동재와 서재 및 대문 건립을 지원하였다.
  • 모친상으로 사직하였다.
곽황(郭 황)
  • 1568~1569
  • 예안현감에서 부임하였으나 임기중 순직하였으며 이황선생이 조문하였다.
유 거(柳 渠)
김적(金磧)
  • 중종 경오년 갑과 3인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다가 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장영(李長榮)
  • 1572년경
  • 남명 조식 선생이 별세하여 만사를 지어 조문하였다.
안홍(安鴻)
  • 立碑
서기일(徐起逸)
정희룡(鄭熙龍)
  • 立碑
정 번(鄭 藩)
이언양(李彦讓)
  • 선정을 베풀어 1586년에 선정비를 세웠는데 1854년에 중수 하였으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이 축(李 軸)
김윤국(金潤國)
  • 영천군수로 이임되어 갔을시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주 하였다가 귀임하여 싸웠으며 이후 그 공으로 선산부사를 거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 빈(李 빈)
  • 임진왜란때 순변사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윤경기(尹景期)
이각(李 慤)
  • 임진왜란시 군량을 인수해 오다가 도둑 맞은것이 수백석이나 되자 수량을 채우려고 따로 작게 만들어 명나라 중국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명나라 군사들이 이를 알고 본래의 섬을 찾아내자 사헌부에서 국문을 하라는 주청이 있었으며 화를 입었다.
황대붕(黃大鵬)
  • 1593년 부임
이희급(李希伋)
  • 1594년 부임 立碑
  • 정유재란 때 진도 벽파진에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러 선무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남해의 난곡사당에 봉안되었다.
조종도(趙宗道)
  • 1596~1597
  • 사직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으로 들어갔는데 황석산성 전투에서 전사 하였으며 숙종때에 안의 황암충렬사에 배향
노윤중(盧允中)
박대수(朴大修)
  • 적량만호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참모관이 되어 금산 이치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안대훈(安大勛)
홍덕원(洪德元)
이천추(李天樞)
  • 1600년경
  • 곤양군수로 있었으며 함양군수로 재임중 파직되었다.
고상안(高尙顔)
  • 1601 ~ 1604
  • 함창현감, 풍기군수 등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 왜란 후에는 지례현감, 함양군수를 지냈고 월명총과 만덕총에 대하여 보고 듣고 체험하고 관심을 기울여 시로 읊고 수필로 기록을 남겼는데 변강쇠전 (가루지기타령)의 배경 설화가 된 것이다.
류순무(柳舜懋)
  • 1605년경
  • 무관출신이다.
윤 인(尹 인)
  • 1605년경
  • 1606 부임
박경업(朴慶業)
홍순각(洪純慤)
  • 동지중추부사까지 벼슬이 올랐다.
이 람(李 覽)
이대기(李大期)
  • 1614 ~
  • 남명선생의 문인으로 저서인 설학집이 있다.
이성길(李成吉)
  • 1615년경
  • 사마시에 장원하여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면직되어 임진왜란때 큰공을 세워 수성도 찰방이 되었다가 합천군수로 재임중 다시 파직되었고 이후 함양군수로 복직하였다.
윤형언(尹衡彦)
남이성(南以星)
윤 광(尹 侊)
이지화(李志和)
최산휘(崔山輝)
  • 1630년경
  • 유효립의 역모 사건을 고변, 그 공으로 영사공신 3등이 되어 평완군에 봉해 진후 함양군수에 부임 하였으나 함양출신 양경홍 (의주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후금의 세력으로 역모를 도모 하다가 사전 고변으로 처형됨 사 건)의 역모사건 발생으로 파직되었고 함양군은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훗날 청송부사로 재임중 죽었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우리군에는 선정비가 있다.
이인전(李仁傳)
  • 화순현감으로 있으면서 왜란때 소실된 화순향교를 재건 하였다.
권심중(權審中)
이인준(李仁俊)
정홍명(鄭弘溟)
  • 1643 ~ 1646
  • 군으로 복군되면서 부임하였으며 병곡면 광평리에 있었던 덕봉사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박수문(朴守文)
  • 선정을 베풀어 후세사람들이 1648년 선정비를 세웠는데 1738년 증손이 진양에 부임하여 중수하고 비각을 지었다.
  • 2001년 상림 역사인물공원으로 이건하였다.
이장영(李長英)
  • 전남 영광의 향교를 중수하였다.
  • 정유재란때 사위가 일본에 잡혀가자 딸이 바다에 투신 자살 하였다.
이지화(李之華)
  • 1654년경
  • 광해군때 간신 이이첨을 탄핵하다 파직되었으며 반정 후 군수.목사를 거쳐 병조참의가 되어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호위하였으며 다시 함양군수로 부임하기도 하였었으나 훗날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갔다가 풀리자 낙향하였다.
이명립(李銘立)
이지형(李之馨)
권론(權론)
원식(元植)
최문활(崔文活)
권숙(權 숙)
조석록(趙錫祿)
  • 政事에 너그러워 훗날 군민이 크게 사모하였다.
유명익(兪命益)
이계(李啓)
  • 1670년경
  •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구휼에 크게 노력하였다.
남몽뢰(南夢賚)
  • 1671 ~ 1673
  • 농민 구휼에 힘써 전국 제일의 군수로 준직의 명을 받았고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후일 귀양갔다가 남원에서 죽어 함양으로 관이 지나 갈 때 선정비를 세웠던 군민이 모두나와 울었다.
김두익(金斗翼)
  • 군민에게 큰 덕을 끼침
권양(權讓)
  • 농사를 권장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후덕과 사랑으로 정사를 하였다.
유진창(柳晋昌)
윤선(尹선)
  • 1681년경
  • 淸德碑 있음
강필주(姜弼周)
  • 청렴한 정사로 군민이 추모하였다.
오명설(吳命說)
이광익(李光翼)
심철(沈轍)
이몽석(李夢錫)
정무(鄭堥)
  • 1692년 학사루를 중수하였으며 선정을 베풀어 1701년 군민이 영세불망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 공원에 있다.
이항(李恒)
조지정(趙持正)
김당(金 당)
장세남(張世南)
  • 안음 현감으로 있을때 광풍루를 중건하였다.
이회원(李會元)
신규(申奎)
이만길(李萬吉)
  • 선정비가 있음
이정화(李鼎華)
  • 1708년경
정중기(鄭重基)
  • 여씨 향약에 의거하여 향속의 순화에 노력했으며, 정언, 지평을 거쳐 형조 참의에 이르렀다.
이상주(李相周)
윤장(尹樟)
  •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1713년 군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 인물공원 안에 있다.
이희주(李熙疇)
  • 사심이 없고 선정을 베풀어 1718년 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안에 있다.
홍우전(洪禹傳)
  • 선정비 있음
이수(李洙)
이우신(李禹臣)
홍우채(洪禹采)
조준명(趙駿命)
  • 선정비 있음
신치복(辛致復)
박사한(朴師漢)
  • 1728 ~ 1729년경
  • 무신란인 정희량의 난이 발생하였으며 역적의 함양군수 최존서를 체포하였다.(선정비 있음)
이성제(李誠제)
  • 성주목사로써 1736년에 독살당하였다.
김우집(金宇集)
김광(金洸)
  • 1730년경
심해(沈해)
허정(許晶)
최명주(崔命柱)
이의익(李義翼)
유순장(柳純章)
우하형(禹夏亨)
유준(柳濬)
조휘(趙徽)
김응로(金應魯)
김치구(金致龜)
박양신(朴良藎)
  • 1744년경
  • 전임군수 김응로와 김치구의 역임을 비난하였다.
이사술(李思述)
  • 1744년경
  • 전임군수 김응로와 김치구의 역임을 비난하였다.
박시좌(朴時佐)
  • 1744년경
  • 마애비(磨崖碑)가 있음
김주익(金柱翼)
  • 1744년경
  • 김광(金 洸)의 아들이다.
조혜경(趙惠卿)
심위
허협(許 浹)
홍하주(洪夏疇)
윤중연(尹重淵)
이수홍(李壽弘)
마애비(磨崖碑)가 있음
서호진(徐好進)
한사길(韓師吉)
박재문(朴載文)
이엽(李燁)
권숙(權璹)
이은창(李殷昌)
  • 임진년에 나라곡식 110섬을 축냈다.
신홍주(申鴻周)
김락풍(金樂豊)
이응운(李膺運)
  • 영암군수 및 숙천군수로 전임하였다.
이한주(李漢籌)
  • 계묘년에 나라곡식 570섬을 축냈다.
임희우(任希雨)
  • 을사년에 나라곡식 130섬을 축냈다.
이득준(李得駿)
  • 1785 ~ 1787
  • 이성길의 6세손이며, 1788년에 마천면 창원마을 입구에 군수 김이의의 비와 함께 있던 것을 2001년 상림 역사인물공원으로 이전하였다.
김노악(金魯岳)
  • 무신년에 나라곡식 880섬을 축냈다
김사석(金思석)
  • 기유년에 나라곡식 250섬을 축냈으며 파직되었다.
정동민(鄭東閔)
윤광석(尹光碩)
  • 1790 ~ 1795
  • 1794년 봉급을 털어 학사루를 중수하였고 안음현감 박지원이 "함양군 학사루기문"을 주는등 교분이 두터웠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절교하였다.
    서계에 흥학재를 세웠다.
송환장(宋煥章)
조명철(趙命喆)
김이석(金履錫)
김상목(金相穆)
  • 규장각 직각을 지냈다.
남주헌(南周獻)
  • 호조좌랑을 거쳐 함양, 남원, 무주, 임천등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형조참의를 거쳐 춘천부사를 지내고 사직했다.
윤정진(尹定鎭)
  • 去思閣이 있다.
김지순(金芝淳)
  • 1825년경
  • 치적을 쌓았다하여 군민이 1826년에 영세불망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 공원 안에 있다.
김기필(金箕弼)
심능정(沈能定)
김노(金노)
이헌주(李憲柱)
  • 1821년경
  • 3년동안 법도를 바로잡고 덕으로 다스려 군민이 1823년 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이회연(李晦淵)
  • 선정비 있음
김이의(金履의)
  • 1825년경
  • 깨끗한 정사로 인해 평화로운 고장을 만들었다면서 군민이 1826년 선정비를 마천면 창원 입구에 세웠으나 2001년 상림 역사인물공원으로 이전하였다.
김이강(金履綱)
  • 선정비 있음
이익수(李益秀)
  • 1831년경
  • 공명정대하고 영재를 많이 길러 군민들이 1832년 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조제만(趙濟晩)
  • 고통과 기근을 덜고 주민편의의 정치를 했다면서 군민이 영세 불망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 공원에 있다.
홍장섭(洪章燮)
홍철모(洪哲模)
홍종호(洪鍾浩)
강이문(姜이文)
  • 1841년경
  • 남계서원 풍영루를 증축하였으며 사심없는 선정을 베풀어 1842년 군민이 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 물공원에 있다.
조연명(趙然明)
  • 1842년경
조규순(趙奎淳)
  • 고부군수로 있으면서 실정하여 동학 농민봉기를 발생케 하였던 조병갑의 부친으로 군민이 1849년 태평성대를 누렸다 하여 영세불망비를 세웠으나 실정에 대하여는 확인이 불가하며 비는 상림역사인물공원에 있다.
조기형(趙基亨)
  • 1854년경
김석균(金奭均)
  • 1856년경
  • 군을 깨끗이 다스린 표본이라 하여 영세불망비를 군민이 1857년에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신태도(申泰道)
오경선(吳敬善)
  • 1862년경
심의현(沈宜絢)
  • 1863년경
서호순(徐灝淳)
  • 태인 현감을 지냈으며 태인 향교에 제향되어 있다.
한치조(韓致肇)
  • 1869년경
  • 폐습을 고치고 예절을 알며 학문이 풍성한 고장을 만들었다 하여 1870년 군민이 영세불망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이원진(李源進)
김석근(金奭根)
  • 목사를 거쳐 판서에 이르렀다.
이상선(李象先)
  • 1876년경
  • 정여창 선생의 13대 종손인 서산군수를 지낸 정재기가 만귀정을 건립하자 방문하여 기문을 지어 주었다.
  • 백성들을 사랑으로 다스렸다하여 1878년 군민이 영세 불망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김봉수(金鳳洙)
  • 1880년경
  • 재임중 치적을 쌓았다하여 1881년 군민이 영세불망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김영문(金永文)
안광묵(安光묵)
김재순(金載舜)
조병갑(趙秉甲)
  • 1886년경
  • 동학 농민 봉기를 유발하게 한 장본인으로서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봉급을 털어 관청을 수리하며 세금을 감면하고 사심없는 선정을 하였다하여 1887년 군민이 청덕 선정비를 세웠으나 사실 유무에 대하여는 확인이 어렵고 비는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 태인군수로 있으면서 부친의 선정비각 건립을 위해 학정을 하였으며 익산 군수로 발령이 났으나 가지않고 관찰사를 통하여 태인군수로 재임명되자 하룻만에 농민봉기가 발생되었으며 조병갑은 도피하였으나 뒤에 파면되었고 유배되었다.
이만윤(李晩允)
오영석(吳榮錫)
  • 1887년경
  • 청렴하였고 봉급을 털어 세금으로 충당하는등 백성들이 덕을 입었다하여 1888년 군민이 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민정식(閔廷軾)
  • 선정비 있음
이윤식(李倫軾)
이원희(李元熙)
  • 선정비 있음
김병정(金炳定)
박정규(朴晶奎)
  • 1903년경
  • 역가(점)를 바로잡고 유학을 숭상하여 풍속을 새롭게 했다고 군민이 1904년 청덕선정비를 세웠는데 상림 역사 인물공원에 있다.
이종원(李鍾元)
  • 1906년경
  • 청계정사를 중건하고 그 유허비의 글을지었다. 선정비가 있다.
이장용(李章鎔)

담당
행정과 행정담당 (☎ 055-960-4210)
최종수정일
2024.01.09 15:45:36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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