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자료

교수정
교수정

함양 교수정

  • 문화재번호 : 문화재자료 제 76호
  • 시대 : -
  • 관리기관 : -
  • 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 문의처 : -

상세정보

교수정은 조선 개국시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면서 은거에 들어간 두문동 72현중의 한분이신 덕곡 조승숙(趙承肅)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태조 7년(1398)에 지은 정자로서 성종때 선생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사제문의 글자를 새긴 비석과 같이 있다.

덕곡 조승숙 선생은?
고려말의 문신. 학자로서 공민왕6년(1357)에 우리 고장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경(경)이고 어머니는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할아버지인 정복주(鄭復周)의 따님이다. 본관은 함안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덕곡(德谷)이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우왕2년(1376)에 진사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사마시 문과에 합격하여 저작랑이 되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에 명나라 초대 황제인 태조 홍무제가 선생의 굳은 의지와 높은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자금어대를 하사하여 중국에서도 널리 명성이 알려졌다.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우고 문하생이었던 이색(李穡), 길재(吉再)등과 도의로서 교류하면서 공부하고 또 후진들에게도 강론하였다.
부여 감무를 역임하던중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동지 72명이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는데 이를 곧 두문동 72현이라 일컬어진다.

태조 7년 향리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교수정을 짓고 후진 양성을 하였는데 왕이 불러도 출사하지 아니하므로 왕이 침향궤(沈香軌)를 보내면서 '너의 성품이 강직하기가 마치 이 물건과 비슷하므로 글씨를 새겨 주노라'고 하였다.

성종은 선생의 청절을 가상히 여겨 제문을 지어 하사하면서 뇌계 유호인(兪好仁)으로 하여금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이 때 내린 글이 수양명월 율리청풍 (首陽明月栗里靑風) 인데 자연암반위에 새겨 거북머리를 조각하고 비를 세웠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3.2m, 폭0.9m, 뚜께0.3m으로 그 뜻은 고대 중국 은나라 제후국인 고죽국의 백이 숙제(伯夷 叔齊) 형제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후자리도 서로 양보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무왕이 은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자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않겠다는 의지로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는데 선생의 충절이 이와 같다는 뜻이다.(일설에는 조정에 출사하라고 무왕이 졸랐으나 거절하자 수양산에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는 설도 있다.)

벼슬을 버리고 초연히 살아간 정신을 있는 미국(薇菊)이라는 현판이 있어 이 비석과 현판은 선생의 충직함과 굳은 절개가 서려 있는곳이기도 하다.

숙종 27년(1701) 도곡서원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덕곡집이 전한다.

담당
문화시설사업소 평생학습담당 (☎ 055-960-6730)
최종수정일
2024.01.01 15: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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