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 게시물 검색 제목 내용 검색 총 64 건의 글이 있습니다. (4/7 페이지) 개암선생의 갓과 문집 [남계서원 창건시 시련 받던 이야기] 조선시대에 지식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향리에 서원이 산재해 있었다. 서원은 학문을 연마하는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원이 많은 곳으로는 서울에서 봤을 때 좌측에 안동이 있었고 우측에 함양이 있었다. 좌안동 우함양이라 부른 것은 안동과 함양이 학문을 숭상하여 가장 인재가 많았고 예의바른 고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왜 함양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서원이 많이 세워졌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서 였다. 서원이란 조선시대 인재 배출의 본산이었으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오늘날의 대학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서원이 주세붕이 창건한 죽계서원(소수서원. 백운동서원)을 처음 세운 이래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것이 함양의 남계서원이다. 그 밖에 ... 이진사와 구진정 [아홉명의 아들이 모두 진사시에 합격] 지금으로부터 120여년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수동중학교 터전에는 조그마한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의 이름이 구진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었는데 그렇게 불리게 된 내력이 있었다. 조선 중기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란 서울 본토박이인 한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진사라고 불렀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그는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세상이 너무나 어지럽고 사색당파의 싸움이 말할 수 없이 치열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때였다. 즉 사상의 계보, 학파의 계보, 그리고 지연으로 인한 파벌, 혈연으로 인한 파벌 등의 난맥상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가운데의 권력투쟁이 말할 수 없이 치열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벼슬도 아니하고 파벌에 가담... 칼바위가 있는 효리 [천석꾼이 30호나 되는 살기 좋은 마을] 수동면 소재지에서 약 4킬로미터 안의쪽으로 올라가면 도로 우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있는데 그 중심지는 효리라고 한다. 우명리라는 마을 이름 그대로 이 마을은 소가 운다고 해서 옛날에는 '소울이' 마을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하고 있다. 마을 뒤쪽에 위치한 해발 308미터밖에 안되는 나즈막한 승안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우명천이 이 마을 가운데를 가로질러 남강지류로 흘러내리고 있다. 우명리는 고색 찬연한 기와집들이 즐비하여 옛날부터 내력있는 마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풍수지리학상으로 보면 마을이 소의 형상을 닮았고 더구나 소가 편안하게 누워서 반추하고 있는 모습의 지세이다. 옛날 사람들은 말하기를 남대문 바깥에서는 제일 살기 좋은 마을 이라고 일컬었는데 그 말은 지방에서는 살기가 으뜸인 동네라는 뜻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 감나무골 물버들나무 [마을의 화재를 막아주는 수호목] 어느 지방 어느 고을을 가도 전설은 산재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발굴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전설 가운데는 그 내용이 무의미한 것도 있지만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거나 경종을 울리기도 하고 절실한 마음을 들어내고 유머스런 흥미거리로 전해오는 것도 있다. 지곡면 시목리 감나무골 동구에는 의좋은 삼형제처럼 물버들나무(갯버들)세 그루가 서 있다. 대부분 마을 앞에는 느티나무나 미류나무, 팽나무 같은 것들이 서 있게 마련인데 이 마을에는 특이하게 물버들나무가 서 있다.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느티나무처럼 가지가 벌어지고 펑퍼짐하게 드리워지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가지가 옆으로 뻗어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시원스럽고 즐거운 그늘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노인들이 종일토... 떨어진 바위 [대고대가 생긴 유래] 옛날 사근 도찰방이 있었던 수동면 화산리에서 남강의 상류인 남계천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면 넓은 들판이 펼쳐지게 된다. 그 들판을 가로 질러 흐르는 남강천의 건너편 강변에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바위섬이 우뚝 솟아 있다. 이 곳이 대고대(大孤臺)라고 하는 곳이다. 속칭 <떨어진 바위>라고 하는데 떠내려 온 바위라고 불리어지기도 한다. 옛날에는 이름 그대로 외로운 바위라고 하였겠지만 지금은 남쪽으로 88올림픽 고속도로가 남계천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화요업이라는 큰 청기와 공장이 들어섰으며 백암산을 등지고 서서 동편의 사근산성을 바라보는 대고대는 지금은 그다지 외롭지 않은 곳이라고 느낌이 들게 되는 곳이다. 대고대 위에 오르면 넓은 들판이 남북으로 약 10km 정도를 전망 할 수 있는데다가 맑은 강물이 발 밑으로 흐르고 있어서... 뽕밭에 얽힌 사랑 [불행한 머슴과 주인집 딸의 비련] 옛부터 우리 고장은 양잠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뽕밭에 뽕따러 가서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나 명주 길삼에 얽힌 애처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에는 길삼이 여인들의 주업이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많은 애환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여기에 노동 민요인 함양 양잠가를 소개하고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뽕밭에 얽힌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너는 죽어 만첩 청산 고드름 되거라 나는 죽어서 아-봄바람 될거나 에헤뒤야 에헤뒤야 두견이 울음운다. 둥둥 가실 너 불러라 어여 밭가에 섬섬섬섬 뽕나무 심어라 아버지 어머니 명주 옷감이 분명구나 둥둥 가실 너 불러라 옛날에는 가난한 생활로 인해 나이가 많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는 예가 많았었는데 이 곳 백암산 기슭에도나이가 서른살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인이라는 노총각이 살고 ... 선녀와 애기 소(沼)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선녀의 아기] 지곡면 덕암리에서 도숭산을 바라보면서 계곡을 따라 3km쯤 올라가면 도숭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을 끼고 20여 가구가 취락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전형적인 산간 마을로 순박한 사람들이 맑은 공기 맑은 물을 마시며 서로 정을 나누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도시화 물결로 이 마을도 머지 않아 폐촌이 될 형편에 처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마음씨가 착한 한 젊은이가 나이 삼십이 넘도록 장가도 못가고 사는 노총각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결혼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나이 많은 노총각을 보면 대개가 다 집안이 찢어지도록 가난하였다. 그 젊은이는 생활이 어려워 산에서 땔감을 해다가 팔아서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생활의 어려움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상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차디찬 겨울도 다 지나가고 어느 따뜻한 봄날이... 유자광의 고모와 대문밖 들 [고모집을 망하게한 서자 유자광] 조선조 오백년을 통해서 권좌에 올라앉아서 권력을 남용하고 국정을 휘두르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의 인물을 한 사람만 말하라 한다면 유자광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문제의 인물이요, 말썽이 맣아 두고두고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보기드문 영웅호걸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가장 간사하고 무자비한 간신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벼슬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무령군에 봉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천한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아들을 구별하여 정실 아내가 낳은 아들을 적자라 하였고 둘째부인 셋째부인에게서 낳으면 서자라고 하였으며 그도 아닌 종년이나 천민의 몸에서 낳으면 얼자라 하였다. 유자광은 이 중에서도 서자도 아닌 얼자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헤아릴 수 없는 ... 정여창의 효심 [강물이 갈라지게 한 효성] 나이 8세된 백욱은 그의 아버지 정육을이 의주로 부임하게 되어 그를 따라 가게 되었으며 의주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순탄하여 막힐 것이 별로 없이 넉넉한 편이었다. 따라서 환경과 분위기는 학문을 익히는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정육을의 집에 장영이라고 하는 명나라의 사신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육을과 장영은 정담이 오고 갔고 육을은 아들 백욱을 장영에게 소개하였다. “얘가 제 아들입니다. 학문을 좋아하여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는 다른데가 많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빠짐없이 꽉 차 있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오.” “이 아이에게 아직까지 이름이 없으니 사신께서 이름이나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은 여창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어 주었다. 장영은 여창이라는 ... 강대무덤 [능욕을 당한 한 여인의 복수] 옛날에는 가난한 생활과 양반들에게 학대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견디다 못해 산으로 도망을 가 산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흉년이 들거나 민심이 흉흉해지면 도둑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설치게 된다. 여기에도 그 도둑들로 말미암아 생긴 이야기가 있다. 안의면 귀곡마을에서 초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는 옛날에 산도둑이 심해서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만 넘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초동마을에서 귀곡마을로 시집을 간 여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초동마을의 친정댁으로부터 어머니께서 병환이 나셔서 무척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그녀는 어머님의 위독한 병환만 생각하며 산도둑이 많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고 초동마을을 향해 잽싸게 걸어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 ‹ 1 2 3 4 5 6 7 › » 담당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 055-960-4510) 최종수정일 2023.08.17 13:10:56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매우 만족함(5점) 만족(4점) 보통(3점) 불만족(2점) 매우 불만족(1점) 의견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