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홍주 (梁弘澍) : 1550~1610
- 작성일
- 2016-07-15 14:26:00
- 작성자
- 민혜경
- 조회수 :
- 629
조선조의 학자로서 자는 대림(大霖), 호는 서계(西溪)이며, 본관은 남원으로 춘추관 편수관을 지내면서 명종 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양희의 아들이다.
학문이 높고 품행이 방정하였으며,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한 남명 조식 선생과 당시 성리학의 대가인 이이, 성혼 등의 문인으로 들어갔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아들 황의 건의로 가재를 팔아 화살을 구입하여 배에 싣고 의주의 행재소로 들어가 왕에게 바침으로써 이듬해 평양 탈환에 쓰게 했다.
1593년 (선조 26)에 평북의 용만에 어가가 행할 때 호위하였고, 문인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뒤, 왕을 모시고 환도하였다.
임진 왜란에 수많은 전과를 올린 공훈으로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어지러운 틈을 타서 간신들이 판을 치자 간신끼리 모함하는 수단을 이용하여 간신을 몰아 내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선생의 업적이 훗날 인정되어 숙종조 때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학문이 높고 품행이 방정하였으며,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한 남명 조식 선생과 당시 성리학의 대가인 이이, 성혼 등의 문인으로 들어갔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아들 황의 건의로 가재를 팔아 화살을 구입하여 배에 싣고 의주의 행재소로 들어가 왕에게 바침으로써 이듬해 평양 탈환에 쓰게 했다.
1593년 (선조 26)에 평북의 용만에 어가가 행할 때 호위하였고, 문인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뒤, 왕을 모시고 환도하였다.
임진 왜란에 수많은 전과를 올린 공훈으로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어지러운 틈을 타서 간신들이 판을 치자 간신끼리 모함하는 수단을 이용하여 간신을 몰아 내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선생의 업적이 훗날 인정되어 숙종조 때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