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 관 (梁 灌) : 1437~1507
- 작성일
- 2016-07-15 14:24:58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590
조선시대의 청백리인 선생은 호는 일노당(逸老堂)이며 함양군 수동면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남원이다.
1457년 세조때 진사시험에 급제한 후, 뜻한바 있어 1460년에 다시 무과에 응시, 급제하였다.
의주판관, 장흥부사를 거쳐 성종때에 덕천군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의주부사로 특진되었다.
의주부사로 재임시 성종의 어찰이 하사되고 청백리에 책록되었으며 가선대부에 올랐고 후에 회령 도호부사를 거쳐 동지돈령부사 겸 부총관에 올랐다.
왕은 그가 덕천군수로 있을시 베풀었던 선정의 일면을 그려 어전 벽에 걸어놓고 조회할 때 유시에 『이는 청백리 양관의 실황이니 제관들은 이를 본받아 선정을 하라』고 했다.
임기를 마치고 귀향할 때 행장이 간소하여 책(소학, 두보의 시집)과 거문고와 삼베이불 한 채뿐이었다.
선생의 첨렴한 관직생활은 뭇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고 공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 오는 길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내 마음 맑은 하늘에 비하면 추호도 본연에 가림 업고자 함이라, 행장을 점검하니 도리어 부끄러우니 베 이불이 오히려 덕천밭에 났도다'
선생의 청렴함을 그대로 엿볼수 있는 구절이라 할수 있는 시이다.
그때 암행어사가 이 사실을 왕께 상주하니 왕은 그의 청렴함을 가상히 여겨 청백리로 선정하고 그의 초라한 행색을 그대로 그려 대궐 게시판에 걸어놓고 관리들이 외직으로 부임 할 때마다 그림을 가르키며 공을 본 받으라 하였다.
숙종27년(1701)에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1457년 세조때 진사시험에 급제한 후, 뜻한바 있어 1460년에 다시 무과에 응시, 급제하였다.
의주판관, 장흥부사를 거쳐 성종때에 덕천군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의주부사로 특진되었다.
의주부사로 재임시 성종의 어찰이 하사되고 청백리에 책록되었으며 가선대부에 올랐고 후에 회령 도호부사를 거쳐 동지돈령부사 겸 부총관에 올랐다.
왕은 그가 덕천군수로 있을시 베풀었던 선정의 일면을 그려 어전 벽에 걸어놓고 조회할 때 유시에 『이는 청백리 양관의 실황이니 제관들은 이를 본받아 선정을 하라』고 했다.
임기를 마치고 귀향할 때 행장이 간소하여 책(소학, 두보의 시집)과 거문고와 삼베이불 한 채뿐이었다.
선생의 첨렴한 관직생활은 뭇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고 공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 오는 길에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내 마음 맑은 하늘에 비하면 추호도 본연에 가림 업고자 함이라, 행장을 점검하니 도리어 부끄러우니 베 이불이 오히려 덕천밭에 났도다'
선생의 청렴함을 그대로 엿볼수 있는 구절이라 할수 있는 시이다.
그때 암행어사가 이 사실을 왕께 상주하니 왕은 그의 청렴함을 가상히 여겨 청백리로 선정하고 그의 초라한 행색을 그대로 그려 대궐 게시판에 걸어놓고 관리들이 외직으로 부임 할 때마다 그림을 가르키며 공을 본 받으라 하였다.
숙종27년(1701)에 구천서원에 배향되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