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영만 (盧永萬) : 1870~1925
- 작성일
- 2016-07-15 13:46:52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578
조선 말기인 개화시대의 교육 선구자인 선생은 백전면 오천리에서 아버지 노정현의 외동아들로 태어 났으며 자는 운경(雲卿), 호는 소당(素堂)이다.
어릴적부터 공부에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경서에 남다른 지식을 가졌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에까지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에 과거제도는 폐지되었고 나라 사정이 날로 어려워지던 26세때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하였으며 27세때 말직인 궁내부 주사로 일하면서 인정을 받게 되었으나 굽힐줄 모르는 기개와 조정의 형편이 선생을 궁내에서 일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않아 3년만에 낙향하였다.
향리로 돌아온 선생은 친구 하석우, 전재규등과 뜻을 같이하여 함양 향교에 함덕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개교는 하였으나 신식 교육을 기피하는 오랜 관습 때문에 학생이 모여 들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고 여러마을을 순회하며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4년, 선생의 노력에 당시 군수였던 박정규와 유지였던 노두현의 협조를 얻어 1902년 학교를 흥학재로 옮기고 학교 이름을 함명(咸明)학교라 고쳤다.
한편, 선생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풍부한 산림자원을 그냥 둘것이 아니라 모자라는 식량의 자족과 임업기술의 확대 보급을 위하여 목공업 학교를 설립할 것을 주장하고 뜻 있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1919년 함양공립 보통학교내에다 함양공업보습학교를 세우고 지물과와 만물과의 2개과를 신설하여 운영함으로써 함양지방의 가구와 목기, 칠기등이 함양의 명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자인지라 학생들을 가르키면서도 토요일만 되면 수십리 밖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봉양하였는데 언제나 과일과 고기를 가지고 갔으며 부인에게 어머니 상에는 고기 반찬이 놓이도록 하라고 시켰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서도 자식을 얻고자 하는 소망은 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니 승려들의 입으로 널리 소문이 나 더욱 지극한 효자로 칭송 받았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백전 보통학교를 자원하여 아침 저녁으로 빈소를 3년간 지켰으며 매 일요일마다 산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청년 시절에서 시작된 선생의 생애는 절망과 비통속에 나라를 잃은 민족을 깨우쳐 보겠다는 교육에 헌신한 산 증인이며 신학문을 받아들여 지금의 함양초등학교를 세우는데 공로가 컸었다.
선생의 큰 뜻과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끝내는 과로로 말미암아 지병이 재발, 1925년 56세를 일기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생의 높은 뜻과 불타는 애향심 그리고 지극한 효도로서 후학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셨으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함양초등학교 교정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
어릴적부터 공부에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경서에 남다른 지식을 가졌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에까지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에 과거제도는 폐지되었고 나라 사정이 날로 어려워지던 26세때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하였으며 27세때 말직인 궁내부 주사로 일하면서 인정을 받게 되었으나 굽힐줄 모르는 기개와 조정의 형편이 선생을 궁내에서 일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않아 3년만에 낙향하였다.
향리로 돌아온 선생은 친구 하석우, 전재규등과 뜻을 같이하여 함양 향교에 함덕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개교는 하였으나 신식 교육을 기피하는 오랜 관습 때문에 학생이 모여 들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고 여러마을을 순회하며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4년, 선생의 노력에 당시 군수였던 박정규와 유지였던 노두현의 협조를 얻어 1902년 학교를 흥학재로 옮기고 학교 이름을 함명(咸明)학교라 고쳤다.
한편, 선생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풍부한 산림자원을 그냥 둘것이 아니라 모자라는 식량의 자족과 임업기술의 확대 보급을 위하여 목공업 학교를 설립할 것을 주장하고 뜻 있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1919년 함양공립 보통학교내에다 함양공업보습학교를 세우고 지물과와 만물과의 2개과를 신설하여 운영함으로써 함양지방의 가구와 목기, 칠기등이 함양의 명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자인지라 학생들을 가르키면서도 토요일만 되면 수십리 밖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봉양하였는데 언제나 과일과 고기를 가지고 갔으며 부인에게 어머니 상에는 고기 반찬이 놓이도록 하라고 시켰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서도 자식을 얻고자 하는 소망은 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니 승려들의 입으로 널리 소문이 나 더욱 지극한 효자로 칭송 받았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백전 보통학교를 자원하여 아침 저녁으로 빈소를 3년간 지켰으며 매 일요일마다 산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청년 시절에서 시작된 선생의 생애는 절망과 비통속에 나라를 잃은 민족을 깨우쳐 보겠다는 교육에 헌신한 산 증인이며 신학문을 받아들여 지금의 함양초등학교를 세우는데 공로가 컸었다.
선생의 큰 뜻과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끝내는 과로로 말미암아 지병이 재발, 1925년 56세를 일기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생의 높은 뜻과 불타는 애향심 그리고 지극한 효도로서 후학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셨으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함양초등학교 교정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