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김한익 (金漢益 : 1887~1933
- 작성일
- 2016-07-15 13:43:10
- 작성자
- 관리자
- 조회수 :
- 583
우리민족에 대한 일본의 강압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라고 하는 한일합방의 치욕적인 사태가 발생되자 수많은 열사, 의사, 지사등이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은채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연 승하하여 국장일이 3월3일로 정하여지자 항간의 민심은 일본을 의심하였고 국장일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 하고자 3. 1일을 기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터진 것이다.
이날을 정점으로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우리 함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3. 28일 함양 장날 오후 3시를 기하여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의거를 주도하였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등은 1교 다리옆(구장터) 에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였고 일본군 헌병에게 주동인물 4명은 체포되었다.
병곡면 연덕리에서 평안도 순천군수를 역임한 김석구(金錫九)와 모친인 성주이씨 사이에서 출생한 김한익(金漢益) 선생은 항상 정의감에 불탔으며 광복만이 민족의 살길이라면서 우국 충절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사람으로서 함양읍 만세사건을 보고 다음장날 혼자서라도 의거하기로 하고 집에서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많이 만들어 가지고 4. 2일 장터로 갔다.
정오쯤 3천여명의 사람이 모여들자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니 주민들의 호응은 함양읍 천지를 진동시켰다.
선생이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붙잡혀 가게되자 군중들이 노도와 같이 뒤를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며 밤을 지새웠다.
이 때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으로 사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쓰러트렸다.
김한익 선생은 1919. 5. 5일 진주 지방법원에서 10월의 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7. 28일 대구 복심법원으로부터 1년 6월의 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다음 출옥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매질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다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 선생에 대한 약력 ♤
○ 1887. 9. 13 -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 출생
○ 1919. 4. 2 - 함양읍 만세사건 주도
○ 1919. 7. 18 - 만세사건으로 1년 6월 형 언도
○ 1933. 6. 30 - 병곡면 옥계리에서 순국
○ 1967. 10. - 함양읍 상림공원내 위거 기념비 건립
○ 1982. 8. 15 - 독립유공자 대통령상 표창
○ 1990. 12. 26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993. 6. 1 - 국가유공자증서 수여
○ 1999. 5. 8 - 국가보훈처와 함양군의 지원으로 병곡면 광평리 선영으로 묘역을 이전 단장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연 승하하여 국장일이 3월3일로 정하여지자 항간의 민심은 일본을 의심하였고 국장일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 하고자 3. 1일을 기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터진 것이다.
이날을 정점으로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우리 함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3. 28일 함양 장날 오후 3시를 기하여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의거를 주도하였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등은 1교 다리옆(구장터) 에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였고 일본군 헌병에게 주동인물 4명은 체포되었다.
병곡면 연덕리에서 평안도 순천군수를 역임한 김석구(金錫九)와 모친인 성주이씨 사이에서 출생한 김한익(金漢益) 선생은 항상 정의감에 불탔으며 광복만이 민족의 살길이라면서 우국 충절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사람으로서 함양읍 만세사건을 보고 다음장날 혼자서라도 의거하기로 하고 집에서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많이 만들어 가지고 4. 2일 장터로 갔다.
정오쯤 3천여명의 사람이 모여들자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니 주민들의 호응은 함양읍 천지를 진동시켰다.
선생이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붙잡혀 가게되자 군중들이 노도와 같이 뒤를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며 밤을 지새웠다.
이 때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으로 사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쓰러트렸다.
김한익 선생은 1919. 5. 5일 진주 지방법원에서 10월의 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7. 28일 대구 복심법원으로부터 1년 6월의 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다음 출옥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매질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다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 선생에 대한 약력 ♤
○ 1887. 9. 13 -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 출생
○ 1919. 4. 2 - 함양읍 만세사건 주도
○ 1919. 7. 18 - 만세사건으로 1년 6월 형 언도
○ 1933. 6. 30 - 병곡면 옥계리에서 순국
○ 1967. 10. - 함양읍 상림공원내 위거 기념비 건립
○ 1982. 8. 15 - 독립유공자 대통령상 표창
○ 1990. 12. 26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993. 6. 1 - 국가유공자증서 수여
○ 1999. 5. 8 - 국가보훈처와 함양군의 지원으로 병곡면 광평리 선영으로 묘역을 이전 단장
- 담당
- 문화관광과 문화재담당 (☎ 055-960-4540)
- 최종수정일
- 2023.11.17 13:4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