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안내도

상림공원안내도
	1. 물레방아
2. 권석도 장군동상 
3. 인물공원 역대군수현감 선정비군
4. 문창후최선생신도비
5. 금호미다리
6. 연못
7. 사운정
8. 만세기념비
9. 대한의사김한익기념비
10. 대한의사하승현기념비
11. 이은리석불
12. 화수정
13. 지압보도
14. 상림연꽃단지
15. 함화루
16. 함양척화비
17. 다볕당
18. 상림음악분수대

상림공원 전체안내도

최치원이 이곳 천령군의 태수로 계시면서 조성하여 역사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인 상림의 전체 안내도입니다.

물레방아

물레방아 전경

상림숲의 정비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상가가 있었으나 상림숲 정비사업으로 상가는 철거되고 이곳에다 1998년도 함양을 상징하는 물레방앗간을 건립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레방아 하면 먼저 옛 우리가락이 떠오르며 지금도 많이 불려지기도 하지요. " 함양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의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특히 1792년도에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안의 현감으로 재직 하신 기간중 연자, 디딜, 수차, 물레방아등을 이용하는 실학사상을 도입하여 선정을 베푸셨던 일은 널리 잘 알려진 일로서 그때부터 우리지역은 물레방아 등이 생겨나고

이용이 크게 늘어나 물레방아 고을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하는 방아에는 물레방아와 통방아 두 종류가 있다. 물레방아에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하는 것과 흘러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의 두가지가 있다. 물레방아는 수로에서 방아의 물받이로 물이 떨어져 물받이가 무거워지면 내려앉아 물이 쏟아지고 빈 물받이가 다시 올라와 물을 받는 운동이 반복되는 동안 방아의 다른 끝쪽에 수직으로 달려 있는 공이가 아래위로 움직여 확안의 곡식을 찧는 것이다. 방아는 대체로 소나무로 만드나 공이와 같은 것은 단단한 박달나무를 쓰며 공이 끝에 쇠를 박기도 한다.

물레방아는 흔히 마을에서 계를 모아 공동으로 세우며 계원이아닌 사람이 방아를 찧을 때에는 삯을 받아 모았다가 수리할 때 쓰거나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물이 흐르는 한 하루종일, 일년내내 방아를 돌릴 수 있지만 모터를 돌리는 기계문명에 이어 이제는 역사의 흐름속으로 점차 묻혀가고 있다.


권석도장군동상

권석도장군동상 전경

장군은 1887년 합천군 대병면 쌍암에서 출생하여 함양에서 성장 하면서 수학하였다.

을사보호조약후 지리산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병과 항거하면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왜병에게 수차례 검거되어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조국광복 5개월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1986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고, 장군의 애국충정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991년 이곳 상림공원에 동상을 세웠다.


문창후최선생신도비

문창후최선생신도비 전경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지정일자
1983년 8월 6일
위치
함양군 함양읍 상림 약수터 앞

신라 진성여왕(887-897)때 문창후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로 부임하여 읍민을 다스릴 때 읍성을 지나 흐르던 뇌계(위천수)가 홍수로 인한 농토와 가옥이 유실되고 군민의 생활이 궁핍함을 살펴보고 치수를 위하여 상림에서 하림까지 둑을 쌓고 물을 돌려 조림을 함으로써 민심을 바르게 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23년에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비다.


금호미다리

금호미다리전경

이곳은 예날부터 금호미 다리라고 불리워 오고 있습니다.
상림숲과 관련된 전설중 금호미와 관련된 얘기 하나 소개 하겠습니다.

고운 최선생은 상림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어디엔가 나뭇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40여회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천령문화제 행사에는 필히 금호미 찾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고 여기 금호미 다리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 근처 어딘가에 금호미를 걸어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못

  • 연못 전경
  • 연못 전경
  • 연못 전경

이 연못은 숲속중앙을 흐르는 소하천을 1995년도에 우리군에서 맨 먼저 시범사업으로 자연석을 이용한 소하천을 말끔히 단장하면서 중간 지점인 이곳에 연못을 조성하게 된 것이며 숲을 걷는 모든 분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를 마련함으로써 요즘은 사진 애호가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연꽃이 활짝 필 때면 볼거리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사운정

사운정 전경

1906년 (高宗 46)에 경상도 유림과 정삼품(정3품) 박정규, 김득창이 문창후 고운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여 모현정이라 불렀으나 고운 선생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이라 고쳐 불렀다.

함양의 시우회원들이 이곳에서 시조창을 즐겨 부르고 있으며, 향토 문화 축제인 천령제의 각종 문예행사가 열려 군민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만세기념비

만세기념비 전경

기미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꽃처럼 일어나자 본군 有志 정순길, 윤보훈, 정순귀, 노경식씨등 4인이 밀의 (密議)를 거듭하여 만세 시위를 함양읍 옛 시장 싸전거리에서 거사키로 하였다.

3월 2일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르며 왜경의 총칼 앞에 분연히 마주섰던 함양읍민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민족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 정신을 기리고자 1985년 12월에 군수 이남기가 상림내의 감한익, 하승현의사 사적비 옆에 크고 우람한 만세기념비를 세웠다.


대한의사하승현기념비

대한의사하승현기념비 전경

우리민족에 대한 일본의 강압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라고 하는 한일합방의 치욕적인 사태가 발생되자 수많은 열사, 의사, 지사등이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은채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연 승하하자 항간의 민심은 일본을 의심 하였 고 국장일이 3. 3일로 정하여지자, 국장일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 하기 위하여 3. 1일을 기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터진 것이다.
이날을 정점으로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우리 함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3. 28일 함양 장날 오후 3시를 기하여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의거를 주도하였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등은 1교 다리옆(구장터) 에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였고 일본군 헌병에게 주동인물 4명은 체포되었다.

1919. 4. 2일 함양 장날 병곡면 사람 김한익(金漢益)이 주도한 함양읍 만세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김한익이 붙잡혀 가게되자 하승현이 군중들을 데리고 노도와 같이 뒤를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역시 순국하였다.

병곡면민은 하승현 선생의 순절을 기리는 뜻에서 1953년 면장의 발의와 군수의 동의로 기념비를 상림 위쪽 뇌계천 도로변에 세웠고 군내의 뜻있는 분들이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솔숲에 사적지를 만들었으며 1967년에는 상림에 의거 기념비를 군에서 건립하였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대한의사김한익기념비

대한의사김한익기념비 전경

우리민족에 대한 일본의 강압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라고 하는 한일합방의 치욕적인 사태가 발생되자 > 수많은 열사, 의사, 지사등이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은채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연 승하하여 국장일이 3월3일로 정하여지자 항간의 민심은 일본을 의심하였고 국장일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 하고자 3. 1일을 기하여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터진 것이다. 이날을 정점으로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우리 함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3. 28일 함양 장날 오후 3시를 기하여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자 의거를 주도하였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등은 1교 다리옆(구장터) 에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였고 일본군 헌병에게 주동인물 4명은 체포되었다.

병곡면 연덕리에서 평안도 순천군수를 역임한 김석구(金錫九)와 모친인 성주이씨 사이에서 출생한 김한익(金漢益) 선생은 항상 정의감에 불탔으며 광복만이 민족의 살길이라면서 우국 충절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사람으로서 함양읍 만세사건을 보고 다음장날 혼자서라도 의거하기로 하고 집에서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많이 만들어 가지고 4. 2일 장터로 갔다. 정오쯤 3천여명의 사람이 모여들자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니 주민들의 호응은 함양읍 천지를 진동시켰다.

선생이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붙잡혀 가게되자 군중들이 노도와 같이 뒤를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며 밤을 지새웠다.
이 때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으로 사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쓰러트렸다.
김한익 선생은 1919. 5. 5일 진주 지방법원에서 10월의 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7. 28일 대구 복심법원으로부터 1년 6월의 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다음 출옥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매질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다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선생에 대한 약력

  • 1887. 9. 13 - 함양군 병곡면 연덕리 출생
  • 1919. 4. 2 - 함양읍 만세사건 주도
  • 1919. 7. 18 - 만세사건으로 1년 6월 형 언도
  • 1933. 6. 30 - 병곡면 옥계리에서 순국
  • 1967. 10. - 함양읍 상림공원내 위거 기념비 건립
  • 1982. 8. 15 - 독립유공자 대통령상 표창
  • 1990. 12. 26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993. 6. 1 - 국가유공자증서 수여
  • 1999. 5. 8 - 국가보훈처와 함양군의 지원으로 병곡면 광평리 선영으로 묘역을 이전 단장

이은리석불

이은리석불 전경
  •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 지정일자 : 1972년 2월 12일
  • 규 모 : 높이 180cm
  • 시 대 : 고려시대
  • 위 치 : 함양읍 운림리 상림숲내

이 석불은 함양읍 이은리 냇가에서 1950년경에 출토된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았는데 불상 주위 약 300m 지점에 망가사(望迦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절의 유물로 추정된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이 불상은 현재 두손이 떨어지고 없다. 머리부분은 단정하며 두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다, 머리는 소발(燒髮)이며, 원만한 얼굴은 다소 토속적인 표정도 엿보인다.

얼굴에 비해 빈약한 두 어깨에는 얇은 부처의 옷이 U자형을 이루며, 두텁게 묘사되어 있는데 U 자형의 평행 옷 주름은 충주 철불들과 비슷한 기법을 보여 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광배는 연화문으로 두광을 표현하였다. 타원형의 광배는 이중의 원형선을 둘러 두광을 만들었고, 머리 주위에는 연꽃 잎을 새김 하였으며, 신광 안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화수정

  • 화수정 전경
  • 화수정 전경
  • 화수정 전경

파평 윤씨 종중(宗中)에서 집안끼리 모여서 우의와 정담을 나누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으며, 상림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압보도

  • 지압보도 전경
  • 지압보도 전경

함화루

함화루 전경
  •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
  • 지정일자 : 1986년 8월 6일
  • 규 모 : 1동(정면 4칸, 측면 2칸)
  • 시 대 : 조선시대
  • 위 치 :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상림공원내

원래는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망악루(望嶽樓)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명칭은 남문에서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이름하였다고 한다. 1932년 고적보존회의 대표였던 함양읍 죽곡리 거주 송계 노덕영(盧悳泳)이 사재를 들여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여 함화루(咸化樓)라고 개칭 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의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이익공식에 구조는 목조 오량가이다. 2층의 내부는 단청을 칠 하였으며, 퇴량에는 용신을 단청으로 그렸다. 2층의 출입은 목조 계단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2층에는 난간을 둘렀다. 하층에는 벽이 없고 기둥만이 서 있는데 기둥은 굽은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문루로 이용될 때에는 하층에 벽과 문짝이 시설되어 있었는데 현재에는 벽과 문짝은 사라지고 기둥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1층 부분은 기둥만이 있어 현재는 정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함양척화비

척화비 전경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264호
  • 지정일자 : 1997-12-31
  • 규모 : 1기
  • 건축시대 :
  • 위치 : 함양군 함양읍 상림 잔디장 입구

조선 고종3년(1866) 병인양요 와 고종8년(1871) 신미양요를 겪고 쇄국의 의지를 고취 하고자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중 하나로 서양과의 화친(和親)을 배척한다는 것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에 세워 쇄국정신을 알리는 비석으로 상림 입구에 세워져 있다. 비신높이 110cm, 폭 55cm, 이수높이 40cm, 두께 19cm의 크기인데 한일합병으로 일본에 의해 전국 척화비가 대부분 훼철 되었으나 이것은 원형으로 보존 되어 있는 것을 바로 세워 단장하였다.


다볕당

다볕당 전경

이곳 잔디장은 함양공설운동장이 건립되기 이전까지는 이곳에서 천령문화제를 비롯한 모든 체육 및 문화행사를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공연등 문화행사가 간혹 열리는 야외무대로서, 그리고 군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야외무대인 다볕당은 순수 우리발로서 다咸자와 볕陽, 집堂자를 써서 다볕당이라 이름하여 1995년도에 건립 하였습니다. 규모로는 연건평이 18평이고 무대면적은 15평으로서 공연을 하기에 적합한 시설로 평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원스레 펼쳐진 잔디장은 3,000평으로서 10,000명이상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다볕당 뒤로는 10여채의 민가가 있었으나 상림정비사업으로 민가는 모두 철거되어 상림의 영원한 보전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담당
문화시설사업소 상림담당 (☎ 055-960-6720)
최종수정일
2023.12.27 17:50:04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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